'나의 고전'이란 제하의 원고를 청탁받고 작성한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고른 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르트르'였는데, 문학작품은 가급적 피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강연 팜플릿을 골랐다. 내가 아는 한,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올해 <문학과 사회> 여름호와 <현대문학> 10월호에서 특집이 꾸며졌다. 하지만, 이 '과거의 영웅' 철학자에 대한 주목은 소략한 편이다. 말년의 주저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올해 책이 나오는 건지는 의문이다. 하물며 <집안의 백치> 같은 걸 기대하기는 현상황에서라면 더더욱 어려울 듯하다. 그런 게 아무튼 작금의 '상황'인 듯하다. 나는 그냥 나대로 그러한 상황에 편승하거나 거스르면서 내가 치러야 할 빚을 까나가도록 하겠다(연말까지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2-3편의 페이퍼를 더 쓸 계획이다). 무슨 빚? 청년시절의 우상에 대한 빚 말이다...

일반적인 고전들과는 달리 ‘나의 고전’에는 ‘이 나’라는 단독성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무나의 고전’이 아닌 ‘나의 고전’이란 의미에서 ‘왜’란 물음 대신에 ‘왜 하필’이란 물음을 수반한다. ‘왜 고전인가?’가 아니라 ‘왜 하필 나에게?’란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물음은 어떤 고유한 죽음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과 상동적이다. 어떤 죽음에 대해서 ‘왜 하필 그가?’라고 묻는.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아직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필 그때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 하나의 ‘고전적인’ 생애로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1980년 4월 15일에 일어났으며, ‘장-폴 사르트르의 죽음’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사진은 사르트르의 장례 행렬).

바로 전해 10월 26일에도 매우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다. 나는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온 충격적인 정황들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한 죽음의 간접적인 목격자이자 경험자가 되었다(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분단국의 한 독재자가 연회장에서 부하의 흉탄에 맞아 숨진 것인데, 그 비극적인 죽음은 그러나 성대한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죽음’으로서의 아우라를 거느리지 못했다. ‘흔한 죽음’이었기에(대개의 독재자들은 그렇게 죽지 않던가?).

해서 어린시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운 사람들 중 아무도 죽어주지 않던 내게 먼 이방인 철학자의 죽음과 성대한 장례행렬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그 죽음을 가장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나는 신문의 일면 전체를 장식했던 이 장례식 보도와 사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신문지를!). 정치 대신에 문학을 인생을 걸 만한 일로 간주하면서 내가 작가로의 길을 꿈꾸게 된 건 아마 그 이후였던 듯하다(비록 아무런 작품도 아직 쓰지 않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작가이면서 철학자, 혹은 철학자이면서 작가. 나는 그런 저자가 되고 싶었다(‘저자의 죽음’이란 유행어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그 고유한 죽음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 사르트르처럼 말이다.

 

 

 

  

장-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망 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흔히 그의 데뷔작 <구토>(1938)나 철학적 주저 <존재와 무>(1943), 혹은 자서전 <말>(1963)이 그가 남긴 ‘고전’으로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고전들 대신에 ‘나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책은 1945년 10월에 있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이다(그러니까 이 ‘팸플릿’은 내년에 환갑을 맞는다). 대학 초년생들도 읽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얇은 책!(<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2종의 국역본이 있다. 하지만, 마음놓고 인용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면이 있다. 새 정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대중강연의 원고였던 만큼 가장 확실하고 일목요연하게 자기 철학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 이 저작은, ‘공적인 교수들’과 대비되는 ‘사적인 사상가’로서 사르트르를 자신의 ‘스승’으로 경외했던 들뢰즈 또한 연극 <파리떼>의 초연, <존재와 무>와 함께 ‘사건’으로 간주했던 작품이다: “이들은 오랜 밤들을 지나온 우리가 사유와 자유의 동일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Deleuze,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77쪽)

  

참고로, 들뢰즈의 글모음집인 이 책은 불어본이 2002년, 영어본이 2004년에 편집돼 나왔으며, 단행본에 묶이지 않은 들뢰즈의 글 대부분을 카바한다. 1975-1995까지 발표된 글모음집이 될 제 2권은 "Regimes of Madness and other texts"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근간 예정이다. 국내의 '들뢰즈 열기'를 감안하면 곧 번역/출간되어야 할 책이다. 책에는 1964년 11월 28일,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 한달 뒤에 들뢰즈가 'Arts'지에 투고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He Was My Teacher)"란 제목이다. 

 

 

  

 

한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실린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서두에서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결미에 나오는 이 구절을 그는 들뢰즈의 텍스트로부터 재인용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르트르와 들뢰즈 두 철학자간의 연계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를 직접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철학 전체는 재현이란 관념, 재현이라는 질서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변적 운동이었다. (그에게서) 철학은 그 자신을 '선(先)판단적인', '전(前)-재현적인' 보다 생생한 세계에 정초하기 위해서 판단의 영역을 떠나 그 활동 무대를 바꾸었다."(His whole philosophy was part of a speculative movement that contested the notion of representation, the order itself of representation: philosopy was changing its arena, leaving the sphere of judgment, to establish itself in the more vivid world of 'pre-judgmental,' the 'sub-representational,')(78쪽) 이러한 평가는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차이보다 더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간의 접점과 연속성이다).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경우 나는 2종의 국역본 외에 불어본(신아사, 1973)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영역본은 월터 카우프만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1972/1988)에 실려 있다. 니체 번역자이자 전문가로 잘 알려진 카우프만의 책으론 국내에는 <헤겔: 그의 시대와 사상>(한길사, 1995),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주저라 할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75)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예전에 니체학도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사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내용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선언적으로 제시돼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난들에 맞서서 실존주의는 무엇이 아닌가, 반대로 실존주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휴머니즘인가를 논변해 간다. 거기에 대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이다(사르트르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바, 그것을 행운으로 간주한 ‘후레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자유를 죽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말했다.)

사르트르가 예로 들고 있는바, 종이칼이나 망치 같은 것을 제작할 경우에는 그 제작에 앞서서 어떤 개념 혹은 디자인이 먼저 요구된다. 머릿속으로 만들고자 하는 물건의 개념(본질)을 떠올리고 그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일관성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따를 때(사르트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마르셀과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인간에겐 어떠한 본질도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즉 실존은 아무런 사전 개념이나 계획 없이 존재하기에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이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인간은 이끼나 토마토나 양배추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나가는 ‘지향적 존재’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만들어!”라는 것이며(“사랑은 내가 해!”란 드라마 대사는 사랑에 대한 사트르르적 태도를 잘 집약해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즉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윤리이며, 이러한 책임으로부터의 도피가 ‘자기기만’이고 ‘불성실’이다. 자유에 처형된 존재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우며 따라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실존과 주체성을 우주의 한복판에, 초월적 중심에 갖다놓는 ‘오만한’ 철학이 어찌 휴머니즘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게 큰소리 칠만 했던 것이 대략 <현대>지를 창간하던 1945년부터 10여 년간이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르트르의 전성기였다. 해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당당한 한 지적 거인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배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에 매혹되어 나는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은 좀 바뀌었다.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로운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사르트르적인 ‘낭만적 합리주의’(아이리스 머독)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에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책들을 읽으면서는 이 사팔뜨기 철학자의 ‘영웅주의’ 철학이 갖는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도 됐다(영국의 저명한 여성 작가 아이리스 머독의 'Sartre, romantic rationalist'(1953)은 영어권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이기도 하다. 머독의 평가는 적절해 보이는데, 나는 사르트르와 들뢰즈 모두 '낭만적'이란 수식어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한 건 그가 나의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때의 영웅성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참고로, <현대>지 창간사는 1966년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 번역/소개된다. 사르트르의 시대정신은 <창작과 비평>의 창간사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가령 사르트르의 전사(前史) 혹은 사르트르 이전의 사르트르.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8개월간의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사르트르에게 곧 30세 남자의 위기가 들이닥쳤다. 그는 거울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마사지해야 했다. 1934년 겨울이었고, 그는 르 아브르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그저 늙어가는 시골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부풀어오른 코담배갑처럼 혐오감을 일으키는 구제불능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그에게서 비곗살을 빼준다고 스웨터를 입은 그의 배를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서 짓궂게 괴롭히기까지 했다! 이것이 내가 읽은 두툼한 전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그는 자신을 우리가 아는 ‘사르트르’로 만들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그는 실존주의가 ‘행동과 앙가주망의 모럴’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 해서, ‘나의 고전’은 적어도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의 책들이 아니라 그의 생애라고 말해야 온당할 듯싶다. 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명을 조금 비틀자면, “고전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자 ‘자기-되기(becoming-Self)’의 행동/사건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05. 11. 28.   

 

 

 

 

P.S. 글의 제목은 (보다 관례적인) '사르트르의 삶과 철학'을 비튼 것이다. 내게서 그의 철학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의 삶이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처럼(2002년판 TV용 <닥터 지바고>는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1965) 시작 장면은 오늘처럼 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저녁 무렵으로 기억된다. 집에 가서 두 명의 지바고를 다시 보고 싶은 저녁이다. 러시아어 '지바고'의 어원적 의미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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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네파벨 2006-01-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사르트르의 "파리떼"라는 단편을 읽어보셨는지요...
중학교 1학년때 집에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그 단편을 읽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엘렉트라의 오빠)의 복수를 소재로 한...햄릿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카뮈의 이방인....등등의 이야기를 한데 섞어놓은 듯 한 그런 이야기......)
망치로 머리를 맞는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살면서 몇 번 경험하기 힘든 진정한 epiphany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아마...그 책이 저에게 특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건...

절대 도덕, 절대적 사랑, 절대적 힘, 완전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어린시절의 알에서 막 깨어나오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거예요.

그 이후로 사르트르를 저의 우상으로 삼고...저 위에 언급된 그의 많은 저서들을 사놓고 읽어보았으나...까만건 글씨 하얀건 종이.....수준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후 사르트르는...
좀 더 approachable한 까뮈나 보봐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파리떼>가 담겨있던 그 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는데...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하지만 그 감동은 되찾을 수 없을것 같아요. 한번 흘러간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듯....

로쟈 2006-01-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문고본으로 갖고 있었는데 가물가물합니다. 드라마 아니었던가요?.,

이네파벨 2006-01-1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연극 대본 형식이었어요.
사르트르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역시 로쟈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