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인간이라는 직업>(문학동네, 2015) 출간기념 행사가 있었다.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저자와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위해 준비차 적은 글을 옮겨놓는다. 행사 전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졸리앵의 두 자녀가 밥을 먹고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도 봐서(아이들은 한국 학교에 다녀서 한국어에 제법 능숙하다)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다('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붙였다). 올해 안으로 그의 책이 또 나온다고 하는데, 미리 기대가 된다.  

 

 

‘인간이라는 직업’이란 문구에 눈에 띄어 책을 손에 든 당신이라면 먼저 두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내가 그랬다). 저자 알렉상드르 졸리앵이 뇌성마비 환자로 17년간 요양시설(센터)에서 생활한 경력이 있는 ‘장애인 철학자’라는 것이 하나이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현재는 ‘서울 대흥동’ 주민이라는 사실이 다른 하나다. 두 번째 사실이 우리와의 ‘인연’에 해당한다면, 첫 번째 사실은 그의 책과 생각을 읽어나가는 데 실마리가 된다. 경험이 사유의 바탕이라면 고통의 경험은 그 단단한 중핵일 것이기에.


관심은 매혹에서 시작된다. 처음 추천사를 제안 받으면서 책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바로 응낙한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는 직업’이라니! 졸리앵은 이렇게 적는다. “인간이라는 이 망할 직업! 즐거우면서도 엄격한 이 직업은 위험을 무릅쓰고 매 순간을 투자할 것을 요구한다.” 멋진 시적 비유를 만났을 때처럼 유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라는 직업’은 사실 졸리앵이 진작부터 쓰던 표현이다. <인간이라는 직업>보다 3년 전에 나온 데뷔작 <약자의 찬가>(1999)에서 ‘인간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의 우리는 인생에서 완전히 정해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어요. 우리는 매일매일 치료와 훈련을 다시 시작하고, 어려움을 하나씩 풀어가고, 우리가 처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어요. 바로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에요. 달리 적당한 말이 없으니 ‘인간이라는 직업’이라고 부를 수밖에요.”


센터(뇌성마비 아동 수용기관)에서 다른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졸리앵은 읽고 쓰기를 배우기 전에 양치질을 배워야 했다. 칫솔은 아주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건 고투를 요구했다. 센터의 좌우명은 그래서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였다. 꽤 오랫동안 두 발로 걷지 못하고 기어 다녔던 졸리앵이 ‘직립보행’을 하게 된 것도 엄청난 모험이면서 반복적인 훈련의 결과였다. ‘인간이라는 직업’이 뜻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조건의 원점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쉽게 허락되는 것 같은 일들이 어떤 경우에는 눈물겨운 고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과의 조우다. 이러한 원점의 확인과 경험은 비단 장애인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 누구도 예기치 않은 장애에서 자유롭지 않기에(나부터도 최근 갑작스레 입원생활을 하면서 실감한 문제다). 


<인간이라는 직업>에서 졸리앵이 ‘즐거운 전투에 대하여’로 말문을 여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우면서 정당하다. “일찍부터, 내게 실존은 그러니까 하나의 전투처럼 예고되었다. 삶에서 최초의 몇 해 전부를 나는 짐승을 길들이는 일에, 뻣뻣한 몸으로 일상에 적응하는 일에 바쳤다.” 졸리앵의 미덕은 그 전투를 즐거운 모험을 수락하는 데 있다. <금강경>의 구절을 비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니, 내가 그것을 장애라 부른다.” 미처 몰랐던 불교의 고단수 유머다. 우리는 웃음 짓게 하는. 졸리앵도 자주 인용하는 니체는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했던가. 웃음을 고안해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했기 때문에! 졸리앵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즐거운 고통, 즐거운 전투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이라는 직업’에 대한 다면적 성찰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원점에 서게 한다.


“인간이라는 직업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영과 육, 두 차원을 조화시키고 잘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언제나 자신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초월하고 다시 태어나고 이미 자기 안에서 실현된 것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해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점이에요.”(<약자의 찬가>) 그렇다,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      

15. 09. 02.

 

 

P.S. 졸리앵에 대해서는 중앙선데이의 인터뷰 기사가 유익하다(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410147&cloc=olink|article|defaul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