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앓다가 회복기 환자 모드로 서재에 들어오니 짧은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낯익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니까. 원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해외여행 대체로 며칠 감기몸살과 함께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병원비야 좀 들겠지만 해외여행 경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암이 아니라 감기몸살이잖은가!). 여행의 재미에는 물론 견줄 수 없지만 고생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면이 있고(무더위속에서 몇 시간씩 걷는 것과 고열로 방안에 널브러져 있는 것), 막상 끝나는 시점에는 상황이 역전된다. 여행은 일상의 단조로움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만 감기몸살은 일상의 안락과 고마움을 재발견하게 한다. 그 정도면 비교거리는 되지 않을까.

 

 

이상이 회복기 환자의 넋두리였고, 며칠 놀았던 서재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일단 '이주의 발견'부터. 내일이 광복절인 만큼 일본 관련서 두 권을 골랐다. 일본의 양심과 일본의 망상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이다. 먼저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양심의 탄생>(동아시아, 2015). 저자는 게이오대 역사사회학자로 국내에 이미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건 " 저자가 아버지의 일생을 인터뷰하면서 민중사, 개인사적 서술을 통해 일본의 지난 20세기를 그려낸 책"이다. 원제는 '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이고 번역본 부제는 '한 일본인의 삶에 드러난 일본 근현대 영욕의 민중사'다.

이 책은 전쟁 체험의 범위를 본격적으로 넓힌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전쟁 전의 삶과, 전쟁 후의 삶을 샅샅이 추적한다. 오구마 겐지의 일생을 통해 전쟁이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전후 평화의식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아버지의 인생사를 각 시대의 사회적 맥락에 위치시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려내는 것이 역사 서술이 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해낸 것이다. 한 인물의 인상과 성격이 아닌, 매 시대 그가 행했던 선택, , 그에 대한 결과를 그저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입체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역사서술의 방식으로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일본 양심의 탄생>이 평범한 일본 민중의 양심을 엿보게 해준다면 그와는 정반대되는 게 이시와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이미지프렘임, 2015)이다. 어떤 인물인가 생소해서 저자 프로필을 봤다.

1889년생, 1945년 사망. 일본육군 중장,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종교인.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한 만주사변의 주범으로 만주국 건국을 주도했다. 이후 자신의 망상인 최종전쟁에 돌입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확전을 주장한 도조 히데키에 반대하다 예편당했다. 이후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국방과학을 가르치다 평론가가 되었으며,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서 증인으로 활동하고 죽었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에 반대했다고 하니까 좋게 봐줄 수 있나 싶지만 둘다 나쁜 놈이다. 스탈린식 표현을 빌리자면 둘다 '더 나쁜 놈'이다. <세계최종전쟁론>은 그의 전쟁론.

만주국을 세운 이시와라 간지의 전쟁론. 러일전쟁 이후 승승장구한 덕에 자신들을 과대평가하며 미쳐가던 일본 육군, 그 와중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미친 한 명의 전략가가 있었다. 곧 닥쳐올 양 대국이 맞붙는 최후의 대전쟁과 그 전쟁의 승리자가 영원한 평화를 일구는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되리라는 그의 망상이었다. 일본을 최종전쟁에서 맞붙을 양 대국 중 하나로 만들겠다던 이시와라 간지는 망상 끝에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렇게 세워진 만주국, 이시와라는 이 만주국을 최종전쟁에서 일본의 가장 든든한 우방으로 키우려 했다.

찾아보니 이시와라 간지에 대해서는 위톈런의 <대본영의 참모들>(나남, 2014)과 호사카 마사야스의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 2012)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사실 만주국은 우리 현대사와 무관할 수 없다. 박정희가 바로 만주국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출신으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국의 제도, 정책, 신념 등이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다(<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 2012)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만주국 관련서들을 드문드문 모아놓고 있는데, 읽을 여유가 없다. 모아놓고 읽을 만한 테마독서 거리다...

 

15.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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