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와 집안 청소를 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놓고, 유튜브에서 음악도 찾아 틀어놓고(그냥 또 빅토르 최) 책정리부터 할 태세를 갖추다 시도 '틀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근에 나온 시집들을 몇권 훑어보았다(장바구니에도 몇 권 넣고). 제목으로 눈길을 끌고, 말의 리듬도 느껴지는 시집들은 여성민의 <에로틱한 찰리>(문학동네, 2015)와 김재근의 <무중력 화요일>(창비, 2015)이다. 둘다 첫시집이란 공통점이 있다. 각각의 표제시를 읽는다.

 

 

먼저 여성민에 대한 소개. "여성민의 시에는 망설임이나 막연함이 없다. 분명하게 대상을 지시하고 그것에 대해 뚜렷하게 말하며 심지어 그것을 반복하여 말해주기까지 한다. 이 반복의 변주 속에서 섬세하고 견고한 시의 구조물이 탄생한다."

찰리가 에로틱해도 되는 걸까 문장은 이어지지 않는다 플룻을 부는 여자의 입술처럼 플롯은 은밀하다 나는 찰리에 대해 생각한다 창문에서는 붉은 제라늄이 막 시들고 있다 찰리는 어떻게 됐을까 찰리에 대해 생각하기 전까지 나는 찰리를 몰랐다 그런데 찰리를 생각했고 찰리가 걱정스러웠다 찰리를 생각하기 전의 찰리와 지금의 찰리 사이에 무엇이 지나갔을까 카페의 테라스에서 여자가 플룻을 꺼낸다 나는 찰리를 생각한 내가 찰리이고 누구인지 몰랐던 찰리는 찰리 a이며 지금의 찰리는 찰리 b라고 구별한다 문제는 찰리에 대해 생각하자 찰리가 떠났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찰리 a에 대해 생각했고 그러자 찰리 a는 찰리 b가 되었고 찰리는 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찰리에서 빌리로 옮겨간 것은 순간적인 일이다 붉은 입술이 플룻에 닿는 순간 찰리는 찰리 b가 떠난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자 찰리 a가 누구였는지 생각나지 않았고 나도 찰리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빌리가 왔다 세계를 잠시 해체하는 것 같은 느낌이 찰리와 빌리 사이로 지나갔다 나는 그것을 에로틱한 각성이라고 적어둔다 여자가 플룻을 가방에 도로 넣는다 플롯은 숨어 있다 

말의 리듬을 만들고 변주해 나가는 솜씨가 눈에 띈다. 툭, 툭, 끊긴 듯한 이미지들만 범람하는 시들을 읽다가 이런 시들을 만나면 내 선호가 어느 쪽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이미지보다 기본적인 건 역시나 리듬이라는 것.

 

그리고 김재근. "김재근의 시는 삶의 국면들을 포착해내는 고독한 자기응시와 생의 전모를 통찰하는 깊은 사유가 도드라지면서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매혹적인 시편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호소력 짙게 다가온다."

바닥이 없는 화요일

슬로우 슬로우

자신의 음성이 사라지는 걸 본다

발이 가는 식물의 잠, 초록의 잠 속처럼

희미해지는 손목

깁스를 한 채,

언제 일어나야 할까

 

창문에 닿는 겨울 음성들의 결빙

맑아지는 링거의 고요

혈액이 부족한 걸까

그렇게 화요일이 왔다

 

화요일을 이해한다는 건 뭐지

화요일은 무얼 할까

 

일주일이 세번 오고

화요일이 두번 오고

 

화요일에만 피어나는 장미와

화요일에만 죽는 장미의 눈빛

밤하늘에 뿌려놓을까

 

가시에 긁힌 잠 속으로

되돌아오는 화요일

이해해도 될까

"화요일을 이해한다는 건 뭐지/화요일은 무얼 할까" 같은 대목이 마음에 든다. 찰리의 안부도 궁금하고 화요일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오늘은 토요일, 그리고 점심. 빨리 쌀을 안치고 책상과 바닥을 닦아야겠다...

 

15.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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