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다솜이친구(171호)가 우편함에 꽂혀 있길래 갖고 들어와서 '감각의 도서관' 꼭지를 옮겨놓는다. 매달 두 권씩, 현대작과 고전을 견주어보는 코너인데, 책 선정은 편집부에서 담당한다. 이달에는 기욤 뮈소의 <센트럴 파크>(밝은세상, 2014)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창비, 2013)를 비교해서 읽는 것이 임무였다. 아마도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처음 읽었는데, <내일>(밝은세상, 2013), <구해줘>(밝은세상, 2006) 등이 베스트셀러인 듯싶다(뮈소의 책들도 더글러스 케네디의 경우처럼 누락이 많은 번역일까?)...

 

 

다솜이친구(15년 3월호) 정체성을 탐구한 스릴러의 어제와 오늘

 

영화적 묘사에 담긴 치유의 서사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와 ‘숨 막히는 서스펜스’가 결합된 소설이라면, 게다가 저자가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기욤 뮈소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베스트셀러 기피 독자가 아니라면 바로 손에 들어볼 만한 작품이 <센트럴 파크>다.

 

주인공인 파리 경찰청 강력계의 팀장 알리스는 간밤에 파리에서 술을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뉴욕 센트럴파크의 벤치에서 깨어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추적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 <센트럴 파크>는 그 추적 과정을 영화적 스토리 라인에 담은 추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열쇠가 되는 건 함께 수갑이 채워져 있는 상태로 옆에 누워있는 남자 가브리엘이다. “당신은 누구죠?”라고 영어로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런 경우 소설은 추리소설의 외형을 갖고 있더라도 정체성에 관한 탐구가 핵심을 이룬다. 즉 소설의 서사는 가브리엘과 알리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과정 자체가 된다.


자기 정체성의 바탕은 기억이다. 작가는 알리스의 3년 전부터의 기억을 떠올리는 회상(플래시백) 장면을 통해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투명인간’이고, 경찰청장까지 지냈지만 부패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아버지의 딸이었다. 그러던 중 의사 폴을 만나 인연을 만들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갖는다. 알리스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임신한 상태에서도 연쇄살인범 수사에 과욕을 부렸다가 오히려 범인에게 역습을 당해 난자당하고 뱃속의 아이를 잃는다. 남편 폴은 충격적인 연락을 받고서 병원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알리스는 한순간의 만용으로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었다고 자책한다. 알리스는 혼자 살아남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떠안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주인공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알리스가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상처에서 벗어날 희망을 발견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센트럴 파크>의 서사는 치유의 서사이기도 하다.

 

 

우리 내면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도 떠올릴 만하다. 드라마, 연극, 오페라도 각색돼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인데, 그 인기의 비결은 우리 내면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인지도 모른다.

 

흔히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도덕적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되지만, 주인공의 전형성은 시대를 넘어선다. 고매한 인격자처럼 보이는 지킬 박사가 내면에 사악한 하이드 씨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선과 악 사이에서 자주 갈등한다면 말이다. 


지킬 박사의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 씨는 하이드 씨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유산 상속인으로 삼은 지킬의 유언장을 떠올린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어떤 관계인가란 의문을 자연스레 갖게 되고, 이야기는 지킬 박사의 진실에 차츰 다가가는 것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소설의 마지막 장은 ‘헨리 지킬의 진상 고백서’로 돼 있다. 그는 누구였던가.

 


주인공 지킬은 ‘나’를 뜻하는 프랑스어 ‘즈(je)’와 영어 ‘킬(kill)’을 합성한 이름으로 ‘나를 죽이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하이드는 ‘자꾸만 숨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예롭고 성공한 미래가 보장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쾌락에 약한 단점도 갖고 있었다. 즉 그에게는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존경을 유지하기 위해서 악한 성격은 억압해왔다. 그러다 자신의 두 가지 본성을 분리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데, 마침내 변신 약을 통해서 그 소망을 이루게 된다. 지킬과 하이드의 통합체였던 그의 인격을 ‘선한 지킬’과 ‘악한 하이드’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선한 지킬’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선과 악이 뒤섞인 지킬’이다. 본성의 개혁은 선한 쪽과 악한 쪽이라는 두 갈래 길이 가능했지만 지킬은 전적으로 악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추한 형상으로 변신해 폭행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 하이드 씨가 과연 지킬 박사의 숨겨진 본모습인가? <센트럴 파크>와 달리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는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담고 있지 않다. 분류하자면 스티븐슨은 기욤 뮈소보다 훨씬 더 비관적인 작가라고 해야겠다.  

 

15.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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