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잡지의 청탁을 받고 며칠 끙끙거리며 쓴 글이다. 각주를 모두 생략하고, 부분적으로 재편집해서 여기에 올려둔다(한 군데 비문을 바로잡았다). 

 

1.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이자 지식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그가 지난 2003년에 내한한바 있다는 전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5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국내에는 ‘지젝’이란 이름과 관련된 20권 가량 번역/소개돼 있다) 지젝은 특히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의 접속을 주된 이론적 지반으로 하여 글을 쓰면서도 세계적인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인기/명성의 원인은 단순한데, 그건 그가 칸트와 헤겔을, 그리고 라캉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대중’이 말이다.

특히나 그의 이름은 일련의 ‘영화책’들 덕분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들에서 지젝은 라캉의 난해한 이론과 고급스런 정신분석 담론을 이해하는 데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안팎의 대중영화들이 얼마나 유용하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21세기형 철학자’를 ‘MTV 철학자’라고도 부른다지만, 그런 포스트모던한 별명보다는 (다소 구닥다리 같더라도) 모던한 별명이 그에겐 더 어울려 보인다. ‘철학계의 록 스타’, ‘문화이론의 엘비스’ 같은.

모호한/난해한 아카데미 담론과 대중문화를 접속시켜줌으로써 지젝은 무슨 일을 하는가? 바로 아카데미 바깥의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주변과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사실 이러한 역할은 백인의 컨트리뮤직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를 결합시킨 록음악의 정신에 얼추 부합하지 않는가? 지젝과 ‘지젝 현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한 영화감독의 말대로, 지젝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시대에 지성주의(intellectualism)란 게 얼마나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우리시대 엘비스’에 값한다(사실 그가 강연 등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제스처는 역시나 폭발적인 엘비스의 무대매너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것인지!). 해서 말하건대, 지젝을 읽는 일은 엘비스의 <버닝 러브(Burning Love)>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겨운 일이며 흥분되는 일이다(우리는 그들의 ‘불타는 사랑’에 후끈 달아오르는 ‘품행 불량한’ 헝크(hunk)이고 매스(mass)이다). 그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와 함께 한국문학을 읽는다? 

2. 이데올로기의 하찮은 대상

지젝이 ‘철학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서구 지식사회에 등록하게 되는 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함으로써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왜곡된 의식’ 혹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만으로는 소위 ‘탈이데올로기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해명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발견되고 폭로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한껏 비웃어주는 ‘냉소적 주체’이기에.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부추긴다. 그것은 물론 ‘환상’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행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아주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하나이다”).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그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실천 속에서 가령, 변기에서 물을 내리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일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지젝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의 세 가지 변기 사용법을 예로 든다.

전통적인 독일식 변기에는 물을 내릴 때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앞쪽에 있어서 우리가 대변 냄새를 맡고 무슨 병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해볼 수 있도록 돼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구멍이 뒤쪽에 있다. 즉, 물을 내리자마자 대변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돼 있는 것이다. 끝으로 영국의 변기는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의 통합형, 혹은 중재형이다. 즉,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대변이 물속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점검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영·불·독이란 지리적 3항에서 세 가지 다른 실존적 태도를 최초로 읽어내고자 했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반성적 철저함’(=보수주의)과, 프랑스는 ‘혁명적 조급성’(=혁명적 급진주의), 그리고 영국은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온건한 자유주의)와 짝지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세 가지 변기 사용방식과도 상응한다. 해서, 우리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탁상에서 떠들어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잠시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곧장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사례들과의 조우는 지젝을 읽으면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사실 우리의 ‘엘비스’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바, 여성 음모(陰毛)의 세 가지 스타일에서 우리는 동일한 기호학적 3각형을 만나지 않을까? 무성하게 자란 헝클어진 음모는 자연적 자발성을 존중하는 히피(hippie)족 여성의 태도를 가리킨다. 반면에 여피(yuppie)족 여성은 잘 가꾸어진 ‘프렌치 가든’형을 선호한다(비키니 라인을 따라 양 다리쪽의 음모를 제거함으로써 중앙에 면도선을 따라 좁은 밴드 형태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펑크(punk)족 여성의 경우에는 음부 전체를 면도해 버리고 (대개는 음핵에) 고리를 달아서 장식한다.

더불어, 이러한 3각형의 구도는 레비-스트로스의 기호학적 3각형 버전으로 말하자면, ‘날것’으로서의 무성한 음모, 잘 손질된 ‘구운’ 음모, 완전히 면도한 ‘끓인’ 음모에 대응하지 않을까? 이러한 사례들까지 동원하여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갖는 가장 은밀한 태도조차도 이데올로기를 ‘발언’하고 ‘실천’한다는 것. 그러니, 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가? 

3. 그토록 하찮은 문학

지젝이 제안한 바는 아니지만, 문학에 대한 ‘공공연한’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세 가지 태도를 대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민족문학’이라는 엄숙주의적 태도를 별개로 한다면, 우리는 히피적 태도, 여피적 태도, 펑크적 태도를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을 각각 자유주의, 유미주의, 반항주의에 대응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레비-스트로스의 분류를 가져오자면, 이들의 문학은 각각 ‘날 문학’ ‘구운 문학’ ‘끓인 문학’이 될 것이다. 

‘민족문학’이 민족적/사회적 대의(大義)와 문학을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날 문학’으로서의 히피문학은 문학과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구운 문학’으로서의 여피문학은 ‘잘 구운 항아리’, 한갓 ‘예술작품’으로서의 문학을 지향한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문학주의’이다. ‘끓인 문학’으로서의 펑크문학은 문학행위를 하위문화적/비주류적 (저항)정신의 등가물로서 사고한다. 이 세(네) 가지 태도/주의가 어쩌면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한국문학을 규정지으며 분할해온 구도는 아닐까?(물론 발생론적인 순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오게 되는 것은 히피문학일 것이다.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그 뒤를 따른다.) 

 

지난 세기 후반에 한국문학은 흔히 명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준거로 하여 1980년대 문학과 1990년대 문학으로 대별됐었다. 90년대 문학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 과잉시대’로 규정된 전(前)시대, 즉 80년대와의 대척점에서 자신의 세대론적 의의와 문학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념이란 지주를, 혹은 ‘공룡’을 상실하거나 배제한 문학은 스스로를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며 문학의 자리를 ‘그늘’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 ‘풍금이 있던 자리’, 이념의 공백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대, 젊은 작가들의 ‘사소한’ 문학은 80년대 집단적 주체를 대신하는 ‘개인 주체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황종연)이었다.

 

 

 

 

  

 

이 세대의 작가들은 환멸과 냉소를 삶과 세계에 대한 주된 태도로 갖는 탈이념적 주인공들을 문학사에 등록시켰고, 이 나르시시스트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회적 소외를 감내하면서 거창한 이념으로부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부터 도주하거나 달팽이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면서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의 ‘가난한’ 자유를 음미하고 향유했다. 이 히피주의 문학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정서’였으며, 그들의 물질적 가난조차도 그 정서의 빌미였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IMF시대를 통과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우리는 60년대 이래의 다소 유구한 전통을 지닌 자유주의 문학, 히피문학 대신에 보다 대극화된 문학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이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이다(김영하와 백민석은 두 전형이다). 물론 이들의 간극을 낳는 것은 경제적 심급이며, 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가난’이 아니라 ‘빈곤’이다. 즉,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혹은 각기 다른 급으로 문학이란 ‘화장실’을 쓰는 것이다. 이 두 갈래의 문학이 결코 지양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와 결코 봉합되지 않는 그 적대의 간극을 문학적으로 반영/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학은 없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젝도 자주 반복하고 있는,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서 빗금쳐져 있기 때문에) ‘사회는 없다’는 명제를 비틀어서 말이다. “우리는 문학으로 하나다”라는 식의 대문자 문학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가장 순진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4. 초월적 상상력과 문학의 존재론  

지난 계절에 나온 젊은 비평가들의 몇몇 비평문들은 지젝의 철학/정신분석학을 적극적/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90년대와 21세기 동시대 작가들의 문학행위에 대한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다. 그 중에서도 김영찬의 <90년대 문학의 종언, 그리고 그 후>는 ‘90년대 문학’ 이후 한국문학의 지형과 향방에 대한 조감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이 ‘종언’에 관한 이야기는 은희경의 신작소설 <비밀과 거짓말>(2005)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그 문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90년대 문학에 대한 ‘형식적 종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분히 우연한 것으로 보였던 ‘90년대 작가’들의 변화에 사후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일정한 집합적 맥락으로 계열화하고 ‘1990년대 문학의 죽음’이라는 분명히 의식화된 지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밀과 거짓말>에 의해서 ‘90년대 문학의 죽음’은 상상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그러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허무의식’이다. 작가 은희경의 데뷔작인 <새의 선물>(1996)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멸’이며, 이 환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환멸의 예외적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만 작동한다. 부정적인 세계 바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온전하게 정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그것은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과 거짓말>의 허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때 허무의 근원에는 세계와의 냉소적인 지적 거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주체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무력함/무능력이 소환하게 되는 것이 ‘죽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한 타자의 질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비극적 자각을 갖게 된다. 

비록 그러한 자각이 ‘주체의 성숙’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위축’을 드러내는 증상일 수도 있지만, 주목할 것은 그러한 소환행위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상상적 절대화”라는 점이다. 즉, 90년대 문학의 근거가 부정되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개인 주체는 크게 보아 ‘상상적 주체’이며, 김영찬은 백민석, 김영하, 조경란, 배수아 등 ‘90년대 작가’들이 최근 보여주는 변화로 이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를 꼽는다.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은 “그동안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 단편적․분산적 징조로만 드러났을 뿐 완결되지 못한 변화의 가닥들을 하나둘 수렴해 그들을 대표하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작가들’의 행적과 미래에 대한 ‘반성적 알레고리’가 된다고 평한다.

이러한 구도는 아직 불확정적으로 구획돼 있는 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우면서 유익하다. 하지만, 문학사적 흐름, 혹은 문맥을 <비밀과 거짓말>이란 작품을 기준으로 하여 소급해가고 있기 때문에, 즉 통시적으로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에 공시적인 차원에서 젊은 작가들의 ‘상상적 주체’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또 변모해 가는지에 대한 조명은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더불어, 문학 존재론의 근간이 되는 상상력을 나르시시즘적인 상상계와 거의 동일시하게 되면 문학이 초월적 상상력과 갖는 원초적인 관계양상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지젝을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사실 칸트 철학에서 현상계와 예지계, 우리의 감성(=가슴)과 지성(=머리)을 매개해주는 것으로 도입되는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양면성에 대한 이해는 지젝의 철학적 주저들에서 자주 반복되며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현상계와 예지계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는 상상력은 수용적인 동시에 정립적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흔히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한데 모으는 종합의 능력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종합활동’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이 상상력의 ‘부정적’ 특징으로서의 ‘분해활동’이다. 즉, 상상력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그대로 수용하여 종합하기 이전에 먼저 분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해활동이 산출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세계의 밤’(헤겔)이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헤겔이 묘사하는 바대로 부정적·파열적·분해적 상상력이 하는 일이란 연속적 현실을 ‘부분대상들’로 해체하는 것이다. 즉 “상상한다는 것은 몸체 없는 부분 대상을, 모양 없는 색깔을, 몸체 없는 모양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산출하는 ‘세계의 밤’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지점에서의 초월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부정적 매개자로서의 상상력의 존재론적 지위가 ‘데카르트적 주체’의 그것과 상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지젝에 따르면,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곧 ‘사라지는 매개자’가 바로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할 때 이미 자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문화도 아닌 상태를 창조해야 하는바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이것은 전면적인 ‘자기로의 철회(withdrawal-into-self)’라는 제스처로서 나타난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이다. 이 광기는 앞에서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데, 상징적 우주 혹은 문화적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세계의 밤’, 곧 ‘분해적 상상력’에 의해서 현실이 소거될 때, 그리하여 세계가 절대적 부정성으로서 경험될 때뿐이다. 데카르트의 ‘자기로의 철회’는 이러한 극단적 상실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상실의 자리, 텅 빈 공간이 바로 주체의 자리이다. 

주체와 상상력의 이러한 차원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의 90년대 작가들이 이념의 상실, 이념의 공백 상태에서 직면하게 된 것은 오히려 상상력으로서의 문학 본연의 ‘부정성’이 아니었을까? 종합적 상상력이 아닌 분해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란 이러한 분해적·종합적 상상력에 근거하며 특별히 문학적 주체란 그러한 상상력이 활성화된 주체인바, 시인/작가의 문학적 태도란 이 상상력, 특히 ‘세계의 밤’에 대한 태도로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려운 밤(=상상력), 혹은 견디기 어려운 텅 빈 ‘주체’를 어떻게 채워넣는가, 어떻게 ‘주체화’하는가 하는 차이로써 말이다(‘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5. 동물원과 미술관 사이 

그렇다면, 문학적 상상력이란 동물원(=자연)과 미술관(=문화)을 매개해주는 것인바,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유난히 동물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대타자로서의 이념이라는 가로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을 헤집으며 상상력의 부정성을 길어 올린다는 의미를 함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신경숙의 초기 대표작 <풍경이 있던 자리>(1993)의 서두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동물의 행동>이란 책에서 인용된 동물원 풍경이었다. 코끼리 거북을 사랑했던 어느 동물원의 수컷 공작새 얘기 말이다. 이후에 ‘동물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대표적인 90년대 버전으로 우리가 꼽을 수 있는 것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2000)과 배수아의 <동물원 킨트>(2003)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두 ‘펑크작가’에게서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먼저, 백민석에 대한 젊은 비평가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즉 그의 소설들은 포스트모던 시대 상징계의 약화로 인한 오이디푸스의 위기와 이에 대해 ‘이상한 가역반응’으로 대처하는 ‘괴물’(‘포스트모던 리바이어던’)들을 주로 테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엽기전>의 세계는 편집증이 무대화된 악몽의 체계이며, 그곳에서 사는 인간은 자연상태로 환원된 인간-동물이다.” 물론 체계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문학적 공격은 현실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체계는 그에 대한 위반을 허용하는 방식을 통해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민석의 전복적 서사가 비록 한국문학/문화의 지형도를 바꾸어놓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기성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반란과 탈주가 아니라 오히려 기성 질서 자체가 허락하고 용인한 한도 내에서의 반란과 탈주라는 느낌이 더 짙다.” 즉, 펑크는 분명 기성의 질서나 체계에 시위하고 반항하지만, 그러한 시위/반항 자체가 오히려 체계의 정상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그 한계는 ‘엽기전’ 전략이라는 내용층위의 전복 전략이 갖는 함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은 ‘에세이스트’ 배수아의 또다른 펑크 전략이 대체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원 킨트>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배수아의 전략은 ‘야수의 탈’을 뒤집어쓰고 아이 유괴, 학대, 살인 등등을 피범벅으로 감행해야 하는 백민석의 전략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단순한데,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 차원에서 문학을 일종의 ‘이방인 놀이’로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로 말하는 것(“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보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자기로의 철회’에 있어서 백민석의 경우보다 훨씬 더 철저하면서도 급진적인 효과를 낳는다. ‘동물원’이라는 이러한 철회의 과정을 경유하여 배수아가 도달하고 있는 지점이 ‘에세이스트’이고 <에세이스트의 책상>(2004)이다(‘에세이스트’야말로 배수아 식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닐까?).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작가의 말’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문제는 순수하게 ‘형태’적인 것이며,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무정형의 생성적 형식을 통해서 배수아는 문학주의라는 여피적 태도를 불편하게 만든다. 

‘엽기 소설’과 ‘에세이 소설’을 쓰는 두 펑크작가의 이러한 차이가 예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90년대 우리문학이 비로소 바닥까지 발을 딛게 된 초월적 상상력에 대한 ‘다시 보기’의 필요성이다. ‘90년대 문학’ 혹은 ‘2000년대 문학’으로 ‘종합’될 수 있는 동질적인 문학장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하찮은, 하지만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이질성들이 유령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하찮은 차이들’에까지 주목하기 위해선 아마도 우리문학에 대한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사랑, ‘불타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매개해줄 수는 있는 사랑 말이다. 지젝과 엘비스의 이런 노래처럼. “당신이 나에게 불을 놓았고,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You gonna set me on fire. My brain is fl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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