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에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주말과 휴일에 처리해야 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지만 콧구멍까지 막고 살 수는 없기에 잠시 여유를 갖는다. 물론 자전거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는 여유는 아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다시 뒤적여보는 정도의 여유다.

 

 

다시 뒤적여볼 수 있는 건 책이 다시 나왔기 때문. <자전거 여행1,2>(문학동네, 2014). 애초에 생각의나무에서 2000년과 2004년에 1,2권이 나왔었지만 모두 절판된 상태였다. 이번에 다시 재구성해서 개정판이 나온 것인데, 내용에 가감이 있는 건 아니고 저자 후기 정도가 추가된 걸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사라진 책'을 다시 읽는 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반가움을 가져다준다. 내가 읽기에 김훈 에세이의 정수는 <풍경과 상처>와 함께 이 <자전거 여행>이다. 이 가을의 쓸쓸함을 조금 눅일 수 있겠다.

 

 

살아있었다면 독문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였을 W.G.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문학동네, 2014)이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출간됐다. <이민자들>(창비, 2008), <아우스터리츠>(을유문화사, 2009), <토성의 고리>(창비, 2011), <공중전과 문학>(문학동네, 2013)에 이어서 다섯번째로 번역된 작품. 특별히 '제발디언'을 자임하는 배수아 작가가 번역을 맡았다. 어떤 작가이고 작품인가.

20세기 말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동시대 가장 경이로운 작가로 손꼽히는 W. G. 제발트. 그는 1988년 산문시집 <자연을 따라. 기초시>를 발표한 이후 2001년 영국 노리치 근처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십삼 년 남짓한 세월 동안 네 편의 장편소설과 세 편의 시집, 그리고 산문, 비평, 논문 들을 펴냈다. 그중 1990년에 발표한 <현기증. 감정들>은 일평생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파괴의 기억과 비전으로 고통받은 저자를 사로잡았던 주제가 모두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수전 손택, 폴 오스터, 존 쿳시 등 또다른 위대한 작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내년쯤의 주요 작품들을 강의에서 읽어보려고 계획중이다. 미지의 거장들과의 조우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온갖 회의와 탄식에도 불구하고 일년은 더 살아보게 만드는 이유.

 

 

마지막으로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에세이 <삶의 격>(은행나무, 2014). 다소 뜻밖인데, <리스본행 야간열차>(들녘, 2007)의 작가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필명. <레아>(상상공방, 2008)까지 포함하면 두 권의 소설에 이어서 철학적 에세이가 번역돼 나온 것. 독일에선 철학부문 에세이상 '트락타투스상'까지 수상했다고 하니까 믿어봄직하다.  

본래 저명한 철학자로서 저자의 역량과 열린 세계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책은 철학적인 무게와 깊이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을 다루는 일반적인 철학서와 달리 서양 고전 문학과 영화, 그 등장인물 간 가상의 대화 및 논쟁을 예시로 들면서 줄거리나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특별한 예비지식 또는 철학적 바탕 없이 흥미진진하게 따라 읽을 수 있다.

 

1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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