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책이 나왔고 이름도 똑같이 '피에르'여서 두 사람을 묶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철학자 피에르 마슈레. 또 다른 공통점은 이번에 나온 두 사람의 책이 재번역본이라는 점. 덧붙여 둘다 나로선 상당히 오랜만에 접하는 책이라는 점. 

 

 

부르디외의 <언어와 상징권력>은 불어판과 영어판이 오고간 텍스트이다. 불어판(1982)이 먼저 나왔지만 영어판(1991)이 나오면서 몇 편의 글이 더 포함되었고, 나중에 이 영어판을 토대로 새로 편집된 불어판(2001)이 나왔다(그래서 영어판의 해제가 불어판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영어판의 번역이 국내에서는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새물결, 1995)란 제목으로 거의 20년전에 출간됐었다. 대학원생 시절이던 그맘때 나도 영어판과 같이 펴놓고 몇 대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다(사실 당시에 부르디외 번역서들도 상당수는 읽기가 어려웠다. 부르디외 해설자가 '구별짓기'란 말을 '탁월화'로 옮기던 시절이었다).

 

이번에 나온 <언어와 상징권력>의 역자는 이렇게 적었다. "이 번역서는 독특한 (자의적인) 구성과 인상적인 옮긴이 서문, 그리고 기념비적인 오역을 통해, 한국에서 부르디외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식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그래서 중복번역임에도 불구하고 "더 정확하고 읽기 쉬운 번역과 조금 더 친절한 역주로써, '부르디외를 재발견'할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는 번역의 동기를 밝혀놓았다. 어차피 구 번역은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 책이므로 오늘의 독자에게는 그냥 '발견'이라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마치 처음 읽는 듯한 표정으로 <언어와 상징권력>을 대하면 되겠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전공의 대학원생이라면 도전해봄직하다. 

 

 

이어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그린비, 2010)의 저자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그린비, 2014)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번역돼 나온 책이다. 구 번역본이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1994)이다. 당시 책을 접할 때 마슈레는 철학자가 아니라 문학이론가의 이름으로 각인되었는데, 스피노자 철학의 권위자라는 건 나중에야 추가된 이미지이다(마슈레는 알튀세르의 제자로 발리바르, 랑시에르와 함께 알튀세르 사단의 삼총사였다). 80년대 후반 문학이론의 쟁점이던 '반영이론과 생산이론'에서 주요한 참조점이었기 때문에 나도 영어판까지 구해서 읽어보던 기억이 난다. 레닌의 톨스토이 비평 같은 장도 들어 있었기에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발자크를 읽어야겠다는 것 정도. 책의 번역자가 발자크 전공자였던 것은 그래서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듣기에 이 번역서 또한 기념비적 오역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형식상으론 두 권 모두 재번역이고 '재발견'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건 나 같은 중년의 독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고, 지금 세대의 독자가 굳이 '기념비적 오역'들까지 들춰가며 읽을 필요는 없겠다. 깔끔하게 새로 번역된 판본으로 읽으면 될 테니까. 다만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가졌던 시의성은 좀 반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요즘 누가 반영이론이니 생산이론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겠는가. 그러니 '발견'은 때로 '발굴'과 구별하기 어렵다. 인생 짧지만, 바로 그렇게 짧기 때문에 20년이란 시간은 짧지만도 않은 시간이다...

 

1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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