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책&(432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종이의 역사'로 잡았다. 종이의 역사를 되새기게 해주는 책 몇 권이 출간되었기에 고른 주제다.

 

 

 

책&(14년 10월호) 종이의 역사와 함께한 인류의 문명사

 

책을 읽는 사람들에겐 물과 공기처럼 필수적이지만 간과되는 물건이 있다. 바로 종이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이 사실은 모두 ‘종이책’이건만 그냥 책이라고 말할 때처럼 종이는 생략되고 숨겨진다. 그러는 사이에 전자책이 등장하면서 종이책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도 횡행한다. 개인적으로는 종이책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을 것이라고 믿지만, 혹 전자책의 역사가 전면화된다면 그것은 종이의 역사와 책의 역사가 결별하는 시대사적 의미도 갖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때 비로소 종이의 존재감이 확연해질 수 있을까. 이달에는 종이의 역사를 다룬 책을 몇 권 읽음으로써 너무 흔하기에 그 소중함이 잊혀온 종이에 대한 합당한 존중을 표하고자 한다.

 

이언 샌섬의 <페이퍼 엘레지>가 ‘인트로’가 될 만하다.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가 부제인데, ‘엘레지’나‘ 애도’란 말에는 종이의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저자는 종이의 죽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가 주안점으로 삼은 부분은 애도가 아니라 감탄이다. 그는 심지어 종이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와 같다고까지 말한다. 비단 책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종이와 밀착돼 있다.


예컨대 “태어나면 출생증명서가 나온다. 학교에서 이런 증명서를 더 모으고, 결혼할 때 한 장 더 생기고, 이혼할 때 또 생기고, 집을 사거나 죽을 때도 생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끝없이 종이가 되고, 종이가 우리가 되고, 우리의 인공피부가 된다. 우리의 존재가 곧 종이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종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을 잃게 될까? 저자는 ‘모든 것’이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종이에 대한 애도는 아직 이른 것이라고 해야 할까.

 

종이의 문화사’이자 ‘종이 박물관’을 자임하는 이 책에서 흥미를 끄는 한 가지 주제는 ‘종이와 정치’다. 종이는 선전 전단으로도 활용되지만 무엇보다도 신분증명서에 이용된다. 종이(신분증)는 우리를 읽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면서 동시에 지울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로 외교부에서 발행하는 형태의 여권은 19세기에 등장했는데, 해외여행자라면 이 여권을 단순한 종이쪼가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여권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증서이자 국적을 입증하는 문서다. 국적과 관련하여 때로는 여권이 폭력과 배척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여권이라는 종이가 없다면 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


한편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종이 한 장은 ‘1938년 9월 30일’이란 날짜와 함께 두 개의 서명이 적힌 종이였다. 네일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당시 독일 총통 히틀러와 만나서 받아온 이 문서에는 “우리는 어젯밤에 서명한 협정과 영독 해군 협정을 우리 양국 국민이 다시는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히틀러의 서명을 받은 종이를 들고서 체임벌린은 의기양양하게 귀국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정작 히틀러에게 그 종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평화의 담보물이었던 체임벌린의 문서는 ‘처량한 종이쪽’으로 전락했다. 종이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에피소드이다.

 

니콜라스 바스베인스의 <종이의 역사>는 좀더 묵직한 분량으로 ‘2000년 종이의 역사에 관한 모든 것’을 개관한다. 일찍이 프랜시스 베이컨은 화약과 인쇄술, 그리고 나침반을 일컬어 중국문명의 3대 발명품으로 꼽기도 했지만 종이가 없었다면 인쇄술도 가능하지 않았다. 비록 종이 이전에 보존 처리한 동물 가죽이나 직물, 나무껍질, 말린 동물의 뼈, 도자기조각 등 다양한 재료가 필기판으로 쓰였지만 종이의 발명이 문명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다.


종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국의 최초의 종이는 나무껍질 안쪽에서 파낸 부드러운 섬유질과 인피와 낡은 어망, 넝마와 밧줄에서 모은 삼을 합쳐서 만들었다. 이 혼합재료를 세척하여 물에 불렸다가 나무망치로 두드려서 미세한 펄프로 만든 다음에 다시 깨끗한 물이 든 통에 넣고 저어서 걸쭉한 상태가 되게 한다. 이어서 헝겊으로 짠 스크린을 대나무틀 위에 펼쳐놓고 걸쭉한 혼합문을 걸러내면 그물망에 남겨진 섬유질이 한 장의 종이로 변화한다. 이 방법은 오랜 세월을 걸치면서 개량되지만 깨끗한 물과 섬유질, 스크린 몰드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복잡한 공정을 거쳐서 종이가 처음 만들어진 계기가 신중한 실험에 의한 것인지 우연한 행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이의 발명 이후 인류 문명사는 종이와 함께 한 역사이고 종이에 의존하게 된 역사다.


중국의 제지술은 전쟁의 전리품으로 다른 문화권에 전파된다. 가장 유력한 설은 751년 아랍의 아바스 왕조와 중국 당나라 군대가 벌인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인의 장인들에 의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종이는 십자군 전쟁 시기에 유럽으로 흘러들어왔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스페인과 시칠리아의 이슬람 정착지였다. 이어서 종이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페이퍼 로드’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데, 유럽의 경우1056년에 스페인에서 시작돼 1235년에는 이탈리아를 거치며, 1348년 프랑스, 1356년 오스트리아, 그리고 1391년에 독일을 지난다. 러시아에는 1576년에 전파되며, 1586년 네덜란드, 1591년 스코틀랜드를 거쳐, 1690년 노르웨이와 북아메리카를 지나고 1818년에는 호주로 이어진다. 일종의 ‘도미노 효과’처럼 번져간 셈이다.


종이는 이슬람 세계를 거쳐서 유럽에 전파되었지만 금속활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개량은 지식의 보급을 가속화함으로써 유럽을 문명사의 전면에 나서게 한다. 반면에 이슬람의 권력자들은 오랫동안 인쇄술을 거부했는데, 이유는 코란 때문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을 직접 쓰는 행위를 숭배했고, 그것도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써야 했다. 하지만 인쇄술은 글쓰기라는 축복받은 행위를 기계로 침범했기에 용납될 수 없었다.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아랍어와 투르크어 인쇄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그 금지령은 무려 300년 동안 유효했다고 한다. 인쇄술의 확산과 함께 종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광란의 종이 쟁탈전까지 벌어진 서유럽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종이의 역사를 관통하는 저자의 여정은 2001년 9.11 테러 현장에서 마무리된다. 테러리스트들에 납치된 여객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과 충돌하면서 두 빌딩은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는데, 거대한 잿빛 연기구름을 만든 것은 사무용지들이었고 맨해튼에는 ‘종이비’가 내렸다. 이 종이들 가운데는 ‘84층 서쪽 사무실에 12명이 갇혀 있다’고 다급하게 적힌 쪽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주운 한 여성이 안전요원에게 건넸지만 이미 두 빌딩에서 84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럼에도 이 종이는 절박했던 한 순간을 증언하며 지금은 9.11 추모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종이의 역사’는 다른 한편으로 ‘종이가 만든 길’의 여정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석학 에릭 오르세나의 <종이가 만든 길>은 바로 그 여정의 기록이다. 중국의 우름키에서 시작된 저자의 여정은 투르판과 둔황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로 이어지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쳐 다시 일본과 인도로 넘어가면서 ‘과거의 종이’와 ‘현재의 종이’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보태진다. 종이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았을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다시 <페이퍼 엘레지>의 ‘인트로’다. “무엇보다도, 종이를 존중하시오!”

 

1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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