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쌓여 있는 수십 권의 책들을 정리하다가(정확하게는 정리하는 시늉을 하다가) 엊저녁에 손에 든 책은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돌베개, 2014)다. 더불어 프랜스시 윈의 <자본론 이펙트>(세종서적, 2014)까지 꺼내와 나란히 펼쳤는데, <자본론>에 새삼 꽂힌 것은 짐작 가능한 대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의 실물을 이번주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예판만으로도 현재 종합베스트셀러 3위에 올라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토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관심의 반영이 아닐까).

 

 

<자본론 공부>에 서문에서 김수행 교수는 예상대로 <자본론> 공부의 의의에 대해서 짚었는데, 책을 마무리하던 시기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즈음과 겹쳤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교훈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 마당에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과학적으로 끝까지 추적한 마르크스의 거대한 작품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가 서문의 첫 문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자본론>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발전, 쇠퇴, 멸망을 모두 설명하고자 한 책이고,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변혁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본론>을 읽지 않을 수 없다(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수혜자들도 그들의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자본론>을 읽는다). "결국 지금의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어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을 <자본론>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막바로 <자본론>을 펴드는 일은 조금 무모할 수 있다. <자본론 공부>와 같은 길잡이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로서는 <자본론>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을 제공하려고 했고, 실제로 '벙커 원'에서 진행한 대중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두리미디어, 2010)과 비슷한 난이도이지 않을까 싶다.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시대의창, 2012)와 새로운 시각의 접근으로 올여름에 좋은 반응을 얻은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 등이 <자본론 공부>의 친구가 될 만하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지나간 신문들도 치우게 됐는데, 미뤄둔 일간지 리뷰도 눈에 띄었다. 7월 28일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생각'란에 실린 케빈 올리어리의 <민주주의 구하기>(글항아리, 2014)에 대한 리뷰다. 제목대로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책.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면 이렇다.  

3억 인구를 통치하는 대규모 공화국에서 소수가 정책을 좌우한 탓에 미국에서는 각종 부패가 잇따랐다. 특히 경제적 문제가 시민평등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2003년 미국 조세감축안은 미국 상위 1%에게 연평균 4만5000달러의 세금을 줄여줬지만, 소득 하위 60% 사람들한테는 고작 연평균 95달러를 깎아줬을 뿐이다. 이는 미국 헌법이 지닌 태생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헌법 초안을 마련한 제임스 매디슨과 입안자들은 민주공화국을 창안했지만, 기업이익집단과 정치권이 야합한 특권층 부패를 막지 못했다.

 

대중은 정치에서 점점 배제됐다. 사람들은 쟁점의 상세한 부분을 탐구하지 않았으며 자기 경험에 기반해 섣불리 사안을 판단해버렸다. 정치가 일부 엘리트의 경쟁으로 전락하고, 여론이 상징과 유행어에 손쉽게 휘둘리게 된 까닭이다. 지은이는 미국 헌법이 초기부터 강한 정부, 대중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부를 지향한 점을 비판하며 정치와 대중의 간극을 좁히는 방안을 탐구했다.

 

이에 올리어리는 대의제를 거부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한편, 미국 전통의 토론인 ‘타운 홀’ 방식에 따른 인민원 제도를 실시하자고 제안한다. 435개 하원 선거구마다 지역민회를 설치하고, 파벌이나 비밀 후원에서 자유로운 배심 시스템과 비슷한 무작위 추첨에 따라 각각 100명의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모두 4만3500명의 인민원이 활동하게 된다. 민회는 핵무기, 국제무역, 복지 문제 같은 국내외 쟁점을 공론장에서 심의한다. 민회의 전국 네트워크인 인민원은 ‘양원제 입법부의 편향’을 교정해 인민주권을 회복하고 헌법적 균형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시민의 자기 통치술’이다.

대안까지 따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부패와 무기력에 있어서는 우리도 미국 못지 않으니까. 저자의 대안은 "시민의 덕성, 공동의 심의, 공공선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의 회복"이다. 리뷰를 쓴 이유진 기자는 그런 회복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매슈 크렌슨과 베전민 긴즈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후마니타스, 2013)보다 희망적이라고 지적한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의 저자들은 이미 "시민의 시대가 끝났고, 정부가 더는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의 회복이란 대안은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과도 상통한다. 샌델은 자유주의의 득세와 공화주의의 쇠퇴라는 정치철학적 용어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적시하고 역시나 공공선에 대한 관심의 회복으로서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다운사이징'된 한국 민주주의, 그에 대한 불만도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이즈음에 '민주주의 구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실상 복지국가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그 너머에 있는 건, 마르크스의 말대로 계급투쟁이고 자본주의 이후다. 한국형 '앙시앵 레짐'은 복지국가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악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또한 무너뜨리게 되지 않을까). 오늘밤 슈퍼문이 뜨면 달님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14.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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