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자유롭게 쓰는 독서 에세이인데, 이달에 고른 책은 김상준 교수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2014)이다. 출간시에 관심도서로 올려놓았었던 책.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4장 '온 나라에 굶주린 자 없도록 하라: 유교 양민론과 구민 정책'은 한국국학진흥원 기획의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에 먼저 수록됐던 글이다. 유교에 대한 시각을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나눈다면, 저자는 강력한 긍정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이견을 덧붙였다.

 

 

 

독서인(14년 5월호) 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책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가고, 또 어떤 책은 만만하다 싶은 분량 때문에 손길이 간다. 김상준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은 그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유교란 주제를 다룬 책은 적지 않기에 특별히 눈에 띌 건 아니지만 ‘정치적 무의식’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저자도 적고 있듯이 “미국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문화비평서의 제목”이어서다. 정확하게는 ‘문학비평서’라고 해야겠다. 발자크와 기싱, 콘라드 같은 서구의 정전 작가들을 견본으로 삼아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그에 견줄 만한 이론과 해석을 제시한 책이라면 지적 자극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분량이 상대적으로 얇은 책이라서 독서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의 전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를 나처럼 모셔두고만 있는 독자라면 ‘후기’이자 ‘입문’ 격이 될 수 있는 이런 속편이 나름 유용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기 전에 미래 해본 계산이 그랬다면, 읽은 뒤의 정산은 반타작이다. 일단 제목은 제임슨의 책에서 따왔지만 저자는 “제임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다. 그가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지목하는 것은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라는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이 오늘날 문명 재편의 시기에 여전히 유효한 현재적 가치임을 웅변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제임슨이 시도한 것과 같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빠져 있어서 좀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맹자의 땀 성왕의 피>을 읽어보려는 독자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두껍다는 불평도 들었다는 전작에 비하면 훨씬 얇은 분량이고 한결 자유로운 기분으로 썼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주의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유교에 대한 재인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유교를 교양이나 상식 수준에서 대강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전례 없이 커졌다. 특히 사회과학적인 유교 이해가 긴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것은 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자는 유교의 비판성과 윤리성을 우리가 재발견하고 재평가해야 할 핵심 덕목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유교가 뭡니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주어질 법한데, 저자는 <맹자의 땀과 성왕의 피> 서두에서 미리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해놓았다. 한마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것이다. <예기>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이 말은 “인간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公)은 요즘말로 공공성이요 정의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천하위공’에 짝이 되는 것이 ‘우환(憂患)’ 의식인데, 천하위공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갖게 되는 근심, 혹은 윤리적 고통이 우환 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맹(孔孟)의 마음이었으며, 이러한 마음가짐은 ‘인류사 보편적인 윤리정신’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유교 이해다.


얼핏 유교 예찬론으로 분류됨직한데,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은 저자가 유교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맹의 마음’을 하나의 제도와 종교로서의 유교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유교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고, 여기에 항의하며 맞서 싸우는 유교도 있었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은 저자에게도 향한다. ‘천하위공의 유교’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는 진정한 유교가 아니라 사이비 유교라고 배제할 게 아니라면, 유교의 두 얼굴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 못지않게 그 두 얼굴 사이의 깊은 연관성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례를 들자면,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북한의 권력 ‘3대 세습’을 ‘유교적’이라고 보는 항간의 속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선양(禪讓)에 의해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맹의 유교원론(原論)”이라는 근거를 댄다.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개창한 조선왕조는 선양이 아닌 세습 왕조였기에 유교원론에 따른 ‘유교국가’가 아니었다는 게 된다. 군주가 바로 국가였던 왕조시대에 국가를 매섭게 비판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역할을 유교가 담당했다지만, 그러한 유교정치의 주역인 사(士) 계급을 저자는 ‘국가 부르주아’라고도 부른다. 알다시피 군주와 국가 부르주아는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공생관계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국가 부르주아로서 유자들의 한계는 국가-정치라는 틀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유교의 현재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에 앞서 이러한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1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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