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325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자음과모음, 2013)를 서평감으로 골라서 썼다. 바우만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읽고 음미할 만한 통찰과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번역과 편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쉽다(특히 앞부분의 번역이 좋지 않으며 부분적으로 본문과 인용문이 구별돼 있지 않은 편집도 독서를 방해한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의 모든 책'이다. 더 밀리기 전에 부지런히 읽어두어야겠다...

 

 

 

시사IN(13. 12. 07) 정부가 거짓말을 고안하는 이유

 

출간 종수가 한 가지 기준이 된다면 올해의 저자로 가장 유력한 이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2002년부터 국내에 소개된 단독 저서가 열다섯 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일곱 권이 올해 출간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2012년 여름에 나온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낸 덕분으로 보이는데, 1925년생으로 아흔에 가까운 노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하게 저서를 펴내고 있어서 앞으로도 당분간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될 듯싶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쓴 바우만의 일기를 묶은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자음과모음)는 이 괄목할 만한 지식인 학자의 사색과 성찰의 깊이를 아주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건 일상의 고백보다는 동시대의 이슈들에 대한 성찰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일기란 형식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고백에 따르면 바우만은 ‘하루 복용량’과도 같이 매일매일 글을 쓰지 못하면 고통에 빠지는 글쓰기 중독자이기도 하지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슈들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은퇴를 거부하지만 신체의 나이는 그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충분한 능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일기는 그런 욕구와 여건 사이의 타협책이다.

 


우리시대의 현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프랑스의 사례를 보자. 바우만에 따르면 21세기는 ‘밀레니엄 버그’라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거짓말과 함께 도래했다. 종말론적 상상이 판을 쳤지만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중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실제로 안정적인 직업과 수입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해졌다. 이런 불안과 혼란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가 2002년에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던 니콜라스 사르코지다. 그는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여 대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사르코지는 어떤 일을 했던가. 그는 사회적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알아냈다고 말하고 교외의 빈민구역(방리유)을 지목했다. 이 ‘악의 근원’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그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마치 작전과도 같은 정부의 조치가 미디어를 통해서 보도되면서 정부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사르코지는 2007년에 프랑스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됐고, 그의 후임 내무장관 역시 사르코지의 수법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안전하지 못한 사회와의 전쟁’이 두 번 반복되면서 국민들은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사르코지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눈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지만 한시적으로라도 그 관심을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에서 돌리게 할 수는 있었다. 그사이 또 다른 거짓말을 고안해내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부의 약속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무관심을 키움으로써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사회적 불안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극우 근본주의의 기반을 강화한 것도 사르코지의 성과다. 이와 유사한 일이 베를루스코니 정부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이명박 정부 시대의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아니 과거형으로만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우리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까. 그런 점에서 여전히 바우만에게서 배울 게 아직 많다. 다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의 일부 부정확한 번역이 그러한 배움에 장애가 돼 아쉽다.

 

13. 12.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