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회의(356호)의 특집은 '2013 출판계 키워드 50'이다. 그중 '소프트인문학' 꼭지를 맡아 짧게 쓴 글을 옮겨놓는다.

 

 

 

기획회의(13. 11. 20) 소프트인문학

 

‘소프트인문학’은 사전에 등재돼 있진 않지만 대략 ‘쉬운 인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쉬운 인문학이란 말도 모호한데 ‘인문학의 문턱을 낮춰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인문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원래 어려운 걸 쉽게 풀어주는 건 사기가 아니냐고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도 많다. 마치 어려운 고전을 다이제스트로 만들어서 떠넘기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색하는 이들은 보통 소프트인문학을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프트인문학은 ‘하드인문학’과 경쟁관계에 놓인 것도, ‘본격인문학’을 대체하려는 것도 아니다. 정색하고 영역관리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판매 부수로만 보자면 ‘올해의 인문서’에 값하는 주현성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만 해도 그렇다. ‘우리 시대를 읽기 위한 최소한 인문 배경지식’을 부제로 내걸었고, ‘한 권의 책으로 인문의 기초 여섯 분야를 꿰뚫는다’는 걸 콘셉트로 잡았다. 무모해 보이는 발상이지만 ‘한권’으로 모든 걸 정리해주겠다는 책은 이전에도 있었다. ‘두꺼운 책’ 붐을 가져왔던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들녘)이 나온 게 2001년이었다. 이 책이 계기가 돼 출판사에서는 아예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시리즈를 펴내기도 했다. 소프트인문학이 느닷없는 경향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한권으로 집약하겠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면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소련사의 권위자이기도 한데, 그가 펴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무려 열네 권짜리다. 소련사 전공자라면 기꺼이 읽어나갈지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열정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카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한권짜리 다이제스트판 <러시아혁명>을 펴냈고 이게 국내에도 소개됐다. 오히려 너무 얇아서 불만스럽지만, 사실 소련사 말고도 읽어야 할 책은 부지기수이니 독자로선 고마운 일이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 포착한 건 그런 책에 대한 사회적 수요다. 이 책의 독자가 본격적인 인문서 독자와 얼마나 중복될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배제적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소프트인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가 어려운 책을 경시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인문학에 해가 될까. 아니면 더 깊이 있는 공부와 독서로 이끄는 길잡이이자 촉매가 될까. 두고 봐야 알겠지만, 좀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라도 독자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책들이 더 나올 필요가 있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뒤이어 나온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2>와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알에이치코리아)이다. 2권에서 주현성은 전작에서 다룬 범위를 더 확장했고, 김경집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 세계를 풍성한 상차림으로 안내한다. 더 읽어볼 책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하다. 많은 분야를 다룰 뿐 결코 물렁하지 않다.

 

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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