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바 강의 환각"이란 기행문의 부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다'이고, 이번에 나온 김윤식 교수의 <김윤식 선집 7 -문학사와 비평>(솔)에 실려 있다(85-113쪽). 읽어 보니, 고희를 앞둔 이 원로 비평가가 작년 8월에 네바강을 보기 위해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 일정을 보니, 2004년 8월 21일 인천공항을 떠나서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가 돌아올 때는 모스크바를 거쳐서 2004년 8월 25일 귀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는 26일 오전쯤에 떨어졌을 테니까 5박 6일의 패키지 관광이지 않았을까 싶다.

 

 

 

 

올해도 5월부터인가 페테르부르크행 직항로가 다시 열리는데, 이 직항로는 작년 여름에 최초로 개설되었고 때문에 작년 여름엔 러시아, 특히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이전에는 보통 모스크바에서 1-2박 정도를 하고 페테르로 가서 3일쯤 관광을 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하절기에 직항로가 열리면서는 막바로 페테르부르크를 향하게 됐던 것이고, 김윤식 교수 또한 그런 여정을 밟았던 것이라 짐작된다(그리고 글의 내용으로 봐서 지난 페테르부르크 여행은 김 교수에게서 첫번째 경험이었던 듯).

그런 여정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네바 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네바 강을 보고 싶다. 네바 강에 가야 한다. K교를 건너며 저물어가는 태양과 네바 강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별러 왔소."란 시작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네바강이 파리도 아니고 런던도 아닌 페테르부르크에만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죄와 벌> 때문이기도 하다. 'K교를 건너며'란 표현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결국 필자가 직접 인용하고 있지만, <죄와 벌>(1866)의 시작은 이렇지 않은가?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 뒤의 아파트에 이중으로 세 들어 있는 그의 방에서 바깥 길로 나와 느릿느릿 망설이는 듯한 걸음걸이로 K교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네바강을 노비평가이자 노교수는 보고 싶어한 것. "태양이 저물어가는 네바 강, 한 대학생 청년(라스콜리니코프)의 망상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강 네바. 만일 네바강이 아름답지 않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으리. 이것이 내가 네바강을 보고 싶은 까닭이오." 그러니까 네바강의 환각은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빚어놓은 환각이다. 하지만, 그 환각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매개적인 것이다. 누구에 의한? 노교수는 일본 작가 마사무네 하쿠초와 거물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경우를 든다.

고바야시의 <네바강>이란 글의 한 대목: "어쩌다 러시아 여행 얘기가화제로 되었을 때 마사무네 씨는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돌려 먼데를 보는 표정이 되어 '네바강은 참 좋아. 네바강은 참 좋아'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사무네 씨의 심중은 물론 알 수가 없었지만 어쩐지 나는 아아, 이 분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상공에서 나는 그것을 생각해냈다. 모스크바의 호텔 큰 식당에서 재즈 소음을 들으며 춤추는 남녀를 보면서, 네바강을 보고 싶다라고 문득문득 생각했다." 고바야시가 보고 싶어한 네바강이므로 '나' 또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노교수는 <죄와 벌>을 열번도 넘게 읽었다고 한다. 콘스탄스 가네트 역의 영역본도 같이(가네트 여사는 가장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와 러시아 영화도 보았다고( "키도 작고 초라한 전당포 노파를 청년이 온 힘을 쏟아 큰 도끼를 번쩍 들어 내리치는" 장면이 나오는 러시아판 <죄와 벌>과 그 주연 배우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언급한바 있다. 예상보다도 '큰 도끼'라는 게 내게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페테르부르크행은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었던 것이고, 이미 정년퇴직하고 고희를 앞둔 노교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가방을 챙긴다. 예술이라는 환각에 한번 더 몸을 싣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것이 '환각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이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에르미타주는 페테르관광의 제1코스이다). "그렇소. 이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덩치는 제법 컸소." 에르미타주에 전시된 그림 이야기가 잠깐 나오지만, 노교수의 기행문은 대부분 페테르와 관련한 문화적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대한제국의 특사 민영환의 페테르 방문기부터, 이태준의 <소련기행>과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그리고 루카치의 도스토예프스키론에 이르기까지. 사실 직접 눈으로 본 러시아, 그리고 페테르부르크란 이런 문화적 기억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아름다움 풍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단한 무엇으로 격상되는 것은 '환각' 혹은 '위대한 망집'과 함께함으로써이다.

"비행기 속에서 포도주 몇 잔에 내가 곯아떨어졌다고 말하지 마시오. 주체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러시아적 망집의 무게에 짓눌려 내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것이오. 그렇다면 5박 6일 동안 나는 과연 마법에 걸려 꼼짝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했던가. 네바 강의, <죄와 벌>의 포로이기만 했던가. 내가 숨 쉴 틈은 아무 데도 없었던가."(112쪽) 과연 어느 정도였던가? "2004년 8월 25일 9시 반. 저무는 모스크바 공항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소. 내내 <죄와 벌>에 시달렸소. 크렘린 광장에서도 바실리 성당에서도 아르바트 거리에서도 그러했고 레닌 묘소 앞에서도 그러했소. 심지어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면서도 그 <백조의 호수> 너머에 있는 <죄와 벌>이 보였소."(109쪽)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들린 이가 작년에 작고한 시인 김춘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만은 아니어서, 노교수는 러시아적 망집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환각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건 에르미타주에서 마주 친 김흥수 화백의 <승무도>("피카소의 방에서 나와 바야흐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복도에서 문득 마주친 <승무도>".  이 그림이 에르미타주에 걸려 있는 유일한 한국 그림이며, 정말로 '복도'에 걸려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름궁전'에서 트럼펫 연주로 들은 <고향의 봄>(거리의 악사들이 아르바이트로 관광객들을 위한 레파토리를 연주한다). 이 두 가지가 그를 러시아 여행의 피로와 멀미로부터 구해준 셈이다.  

"내 것인 환각 하나, 내 것인 환청 하나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나를 깨운 것은 덜커덩 하는 비행기 바퀴 내리는 소리였소. 긴 다섯 개의 낮이었고 짧은 여섯개의 밤이었소. 공항에 내리자 늙은 마누라가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소."(113쪽)

개인적으로 나는 작년 8월 25일 저녁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모스크바 통신'에서는 그날을 니체의 사망 104주년이 되는 날로 기록하고 있다). 일행과 같이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한국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한국에서 온 노교수는 모스크바 제2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 나름대로 인연이라 할 만하다(그날 그 시간에 나는 노교수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인연은 아마도 더 이어질 만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나 또한 <죄와 벌>에 시달렸던바,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면 노교수도 한번쯤 읽어줄 듯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 멀지 않은 장래이길 바란다...

05. 04. 30.

P.S. 더위를 좀 식히려고 후배들과 칡냉면을 시켜먹고서 배부른 김에 몇 자 적었다. 내가 네바강을 처음 본 건 작년 10월초이며, 나 대로의 기행문은 '모스크바 통신'을 참조하실 수 있다. 평소에 존경하는 노비평가의 여정이 우연히도 '익숙한' 것이서 덩달아 '네바강의 환각'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친구와 함께 걷던 네바강의 주변의 거리들과 다리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던 기억들 등등). 비록 나로선 남성적인 네바강보다는 여성스러운 모스크바강에 더 애정을 느끼긴 하지만...

끝으로, 노교수의 글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오타 및 착오를 적어둔다. 98쪽에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까지 갔던, 대한제국의 민영환 특사  일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는 페트로그라드)에 왔다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 이번엔 한참 건설 중인 시베리아 철도로 귀국했소."(98쪽)라고 돼 있는데, 페트로그라드란 명칭은 1차 대전 발발(1914)와 함께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를 대신했던 이름이므로 대한제국시절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100쪽, 각주 13)에서 이태준의 책 <소련기행>(깊은샘)이, '졸저'로 돼 있는데, 당연히 오기이다. 그리고 103쪽에서 "범죄 전문가인 예심판사 포로비치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인물 스비드리가이로프"란 표현이 나오는데, '포로비치'는 '포르피리'의 착오인 듯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의 첩자일지 모른다는 것은 처음 듣는 내용이다. 106쪽 등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수학공식이 '1+1=2'로 돼 있는데,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2+2=4'라고 해야 맞다.

 

 

 

 

더불어, 111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직계 혁명가 레닌"이란 표현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라스콜리니코프의 직계'라고 하면 모를까). 굳이 계보를 찾자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863)의 작가/비평가 체르니셰프스키의 직계이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체르니셰프스키 등의 동시대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비에트에서 대단히 폄하되며, 1930년대에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리키조차도 그런 비판에 가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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