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주말이지만 날씨는 이미 5월 중순을 넘어서 치달리고 있는 듯하다. 초록이 무성하고 꽃들이 만발하다. 하지만 이런 날도 '무능한'(요즘은 '뻔뻔하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가장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학교에 나와 있다. 책상엔 읽어야 할 책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머릿속에 조만간 쏟아내야 할 글자들이 웅성거린다(제대로 잘 뽑아내야지 그나마 쫓겨나지 않을 텐데). 나도 그렇지만, 주말까지 쉬지 못하는 책들도 안쓰럽긴 마찬가지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 중에는 <일의 발견>(다우)이란 것도 있는데(원제는 'The Working Life'),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지금 세계는 두 부류의 인간종으로 나뉘고 있다. 그들은 바로 노동자와 실업자다. 노동하는 인간은 마치 '인간기계'처럼 괴로워하고, 실업자는 인간축에도 들지 못하는 형편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왜 일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도 사라졌다. 인간이라면 일을 해야하고, 일을 하는 인간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낙오자의 푸념일 뿐이다."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아주 직설적으로 일에 대해서 까발려놓고 있다. 게다가 너무도 선명한 구도. 노동자냐, 실업자냐. 무엇이든 따져묻는 못된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신의 '신분' 자체의 애매성 때문에 그 이분법에 동의하기 어렵다(법적으로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애매성? 공부도 노동이라면 나도 노동자이긴 한데, 주변에서는 실업자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보기엔 (준)실업상태에 있으면서 나 혼자 '노동'한다고 피곤해 하는 꼴이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일을 하는가?'란 고민도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격 조건에도 미달한다(그이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해서 나의 '생각'은 나의 '푸념'인바, 나의 공부 또한 곧 나의 푸념이다. 이건 상호 교차적이어서, 나의 공부는 범주상 '실업자의 노동'이면서 '노동자의 푸념'이다. 소개에 다르면 <일의 발견>이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철학에서부터 피터 드러커의 경영이론까지를 다룬다고 하는데, 거기서 살짝 암시되는 것이지만, 현대사회에서의 일이란 '비즈니스'이고 '돈버는 일'를 뜻한다. 이게 일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정의이다.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돈버는 것이면서 거꾸로 돈버는 게 일이다. 돈되는 일이 아닌 것은, 돈 안되는 일은 일도 아니다.(어느 시에서는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라고 노래되지만).

 

 

 

 

그렇다면, 일로부터의 해방, 곧 노동해방은 돈으로부터의 해방과 사뭇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을까? 화폐(돈)에 대한 사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의 한 장을 바로 그 문제에 할애한다. 지역통화로서의 시민통화를 자본주의 화폐경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혹은 그걸 좀 제어하기 위한 원리이자 장치로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재무적인 사고가 좀 빈곤한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을 본격적으로 논평할 형편이 안되지만, 적어도 그런 통화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조금 바꿔보자는 아이디어가 '도덕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요구보다는 '현실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한다.  

지난 4월 19일 한겨레에는 홍세화 위원과 김수행 교수와의 대담이 실렸는데, 신자유주의를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대담의 후반부에 김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유럽에서는 실업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사회복지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 쪽에서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후진국으로 신자유주의 해체가 넘어오겠죠... 후진국에서는 선진국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실업자는 많고, 외국 자본의 횡포는 심해서, 반발이 거세질 것이고요. 결국 세계적인 민중연대가 상당히 진척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후진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면, 신자유주의는 수년내에 막을 내릴 것이라고 봐요."

 

 

 

 

마지막 문장의 전망에서 방점이 (반대가 터져나오고 움직임이 시작되면, 이라는) '조건'에 놓여 있는 건지, (수년내에, 라는) '시점'에 놓여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진단과 전망은 아주 단순명쾌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홍 위원의 질문은 비록 그에 맞장구치는 것이지만 한술 더뜬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김 교수의 대답: "자본 쪽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자본 이동을 너무 자유롭게 해서 금융공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규제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요구할 거예요. 자본과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그 안에서 수익성 위주로만 가는 방식에 규제를 가하게 될 것이고, 생태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결정에 더 많은 사람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형태로 갈 것입니다."

이러한 전망의 결론은 '장미빛'이다. "복지국가가 되살아나면서 좀더 평등하고, 좀더 많이 참여하고, 계획성이 더 많이 도입되는 자본주의입니다.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기본적으로는 자본가가 주도권을 갖겠지만,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입니다." 요는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로의 도약인 것(자본가가 '여전히' 주도권을 갖지만 노동자/시민이 '많이' 참여하는). 아주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참여경제'라면, '정도'의 문제로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닐까?(저마다의 참여경제!) 

해서 공부가 부족하고 이래저래 의심이 많은 나의 결론은 아직도 푸념이 많이 섞인 것이다. "어져 내 일이야!"(황진이) 같은 것. 그녀의 이 시구를 영어로는 'O my business!'라고 옮겨놓고서 혼자 낄낄대던 적도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같잖은 노동'에 매여 있는 나의 '비즈니스'는 상황이 이제나저제나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05.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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