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 북리뷰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간추렸다. 천병희 선생과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정암학당의 플라톤전집판으로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연구서로는 양승태 교수의 <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이화여대출판부, 2013)이 유익하다.

 

 

 

한겨레(13. 10. 07) 네 자신을 알라? 너의 무지를 알라!

 

고대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단연 소크라테스의 재판일 것이다. 제자 플라톤을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인 만큼 ‘바로 이 한 장면’으로 꼽아도 무리가 아니다. 아테네 시민 세 사람에 고발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펼친 변론을 기록한 것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어떤 죄목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는가.

말투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가 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만 유의해 달라고 배심원단에 당부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고발에 대한 변론을 전개한다. 직접적으로 그를 법정에 서게 만든 이들이 ‘나중의 고발인들’이라면 그보다 먼저 자신을 고발한 이들은 ‘최초의 고발인들’이다. 이 최초의 고발인들은 그를 모함한 불특정 다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색하고 지하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며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으로 만든다”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아테네에서 지혜로운 자로 명성을 얻은 소크라테스이지만, 그 지혜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앎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한 친구가 델포이의 신전에 가서 물은즉,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없다고 하기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정치가와 시인과 장인들을 찾아 나선다.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했다. 단지 지혜로워 보일 뿐이었다. 그는 가장 지혜로운 자란 “지혜에 관한 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라는 걸 깨닫는다. 바로 소크라테스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경구는 실상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의미다. 철학이란 바로 이 무지에 대한 앎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온전히 신탁에 바쳐진 삶이다. 인간의 지혜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게 신탁의 메시지이기에, 지혜롭다는 평판을 듣는 이라면 누구든지 찾아가서 그의 무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듯 신에 대한 봉사로 분주하여 소크라테스는 나라 일이나 집안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나중의 고발인들에 따르면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그를 흉내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바람에 죄를 덮어쓴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을 아예 믿지 않는다고까지 고발당하지만 신에 대한 봉사에서 소크라테스를 넘어설 자도 드물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고소는 근거가 없다.

여기까지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나름대로 전략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도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만큼 긴 변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사람들의 편견과 시샘 때문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데 그런 생각이 그에게 어깃장을 놓게 만든다. 그는 배심원단을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심지어 아테네에는 자신의 봉사보다 더 큰 축복이 내린 적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사형에 처하는 대신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 마땅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13.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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