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의  '유전'은 遺傳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요즘 언론에서 매일 같이 들먹이고 있는 '러시아 유전개발사업'의 그 油田, 즉 '기름밭'을 말한다(이 기름밭이 자원빈국인 우리 마음의 콩밭이다). 이 유전은 최근, 석유수출로 신흥 경제대국 브릭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대표할 수 있는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그러니까 '러시아'란 수식어구와 가장 안정적인 조합을 이루는 단어로 등장한 것이다. 이름하여 '러시아 유전'. 그것이 기존의 관용적 단어결합인 '러시아 문화', 특히 '러시아 발레'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아침신문은 대개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사업 의혹 사건과 관련하여 특검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노대통령의 발언을 1면에서 크게 다루었고, 그에 대한 검찰과 정치권의 반응을 자세히 보도했다. 게다가 사설로 훈수도 두고. 이런 사정은 비단 내가 읽은 한국일보만의 것은 아닌 듯싶다. 작년 노대통령의 방러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시베리아의 가스 개발 협력건으로 기억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자원부국 러시아는 유전 혹은 가스로 각인돼 있는바, 계속 의혹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유전개발 사업 또한 실상은 그러한 한국식 러시아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상적/통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개발투자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 사건의 내막과 자초지종은 나의 관심이 아니다. 감사원과 검찰, 그리고 특검까지 달려들 태세이므로 사건의 진상은 곧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진상이 없는 사건이 아니라면). 나의 관심은 좀 다른 데 있다.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이달말에 문을 여는 '러시아문화의 집'도 원장 인터뷰와 함께 크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사들을 읽으면서 러시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가 분열(증)적이지 않나 싶었던 것. 이 소개 기사의 타이틀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 러시아 알리고파"이다. 

"민간인이 세운 첫 외국문화센터"로서의 의의를 갖는다는 이 '러시아문화의 집'(www.rccs.co.kr) 개원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반가운 일이고 환영할 만하다. 초대 원장을 맡으신 분과도 안면이 없지 않다(작년 여름에 모스크바 대학 구내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이 분에 따르면,  1991년 유학시절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볼쇼이극장과 인근 여러 박물관, 미술관은 항상 만원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손 잡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하는 과외선생은 전공자가 아니었는데도 문학 얘기가 평론가 수준이었다.(그런 문호의 풍요를 누리다가 95년 귀국하니 한국은 앙상했다.)"

작년에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던 50대의 여자 교수도 내게 (아마 어릴 적부터 지겹게도 보았을) 발레의 황홀함에 대해 감탄을 곁들여 이야기하던 걸 상기해 보면, 러시아인들의 '문화필'과 자부심은 우리가 못말릴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대한 정확한 기술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이 아니라 "배 곯기 때문에 발레(라도) 봐야하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러시아 발레의 융성은 그것을 뒷받침했던 제정 러시아 황실의 권력과 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권력의 상관항은 민중의 고통이었다.

 

 

 

 

최근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개봉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는 제정 러시아의 한 노예 출신 작곡가의 흔적을 찾아서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찾아온 러시아 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노스탤지어를 못 이기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작곡가는 귀족들의 연회가  벌어질 때면 정원에 조각상으로 서 있어야 했다. 러시아 음악과 예술의 그 음울한 깊이는 그러한 고통과 한(恨)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그것은 원래부터 배부른 자들의 예술이 아니라 배곯은 자들의, 배곯은 자들을 위한 예술이었다. 때론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간절한 몸짓으로서의 예술(가령 니진스키의 경우).

<노스탤지어>에서의 시인은 이탈리아에는 "구두가 너무 많다"는 독백도 내뱉는데(벤야민은 모스크바에 대해 "시계점이 너무 많다"고 적었다), 그걸 한국식 버전으로 바꾸면 한국에는 "식당이 너무 많다"가 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그건 외부자의 시선으로만 감지될 터인데, 러시아에서 1년간 체류하다고 돌아온 내게 가장 눈에 띈 건  너무 많은 식당이었다(가격 대비 만족도에서 한국식당은 짐작에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느끼한 중국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건 떠나기 전의 나로선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듯 풍족한 먹거리와 그에 대한 관심(TV의 음식 관련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많은지!)이 '앙상한 한국(문화)'의 상관항이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추락(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바 있다) 속에서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러니까 그들을 미치지 않도록 해준게 있다면 나는 그것이 '문화적 교양'이 아닐까 한다. 그 교양은 그나마 사회주의 시절 양질의 교육과 문화적 향유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전후 개발독재 과정을 감내하면서 그나마 먹고 살 만한 처지(소위 '물적 토대')를 이룬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적 물욕과 투기심, 출세욕의 광란 속에서도 버텨올 수 있도록 해준 건, 그러니까 아주 미치지는 않도록 해준 건 '배부르게 먹기'이다(혹은 자식은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욕망).

단순하게 말하자면, 러시아가 경제적 허기를 문화의 향유라는 영혼의 끼니로 때웠다면, 한국은 문화적 허기를 복부적 포만으로 무마했다(영혼의 허기는 교회에서 해결하고). 이건 어디가 잘 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생존을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했느냐의 문제이다(그러니까 한국과 러시아는 상사적이지는 않지만 상동적이다).  발레냐 유전이냐.

 

 

 

 

최근 출간된 도이처의 <트로츠키>의 역자는 후기에서 이런 내용을 적고 있다. 지난 99년 그가 언론인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책(<트로츠키>)를 번역하던 시절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뛰기도 했었다고. 그런데, "옛날에는 페테르부르크와 페트로그라드, 레닌이 죽은 뒤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그 도시의 언론사 지사장은 그 유명한 동궁(차르의 겨울별장)이 자리잡은 지역의 공산장 서기장을 지냈다고 한다. 나는 소비에트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다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보드카와 아르메니아산 포도주병을 휘두르면서 우리나라의 폭탄주보다 더 독한 폭탄주를 권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를 외칠 뿐 혁명의 몰락과 소비에트의 붕괴는 아예 화제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여섯 해가 니난 지금,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부패가 뒤범벅이 된 채 경제대국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이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역자의 암묵적인 전제와는 다르게,  과거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에서도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은 즐겁거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그건 현재 미국인들의 삶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문제이다. 러시아는 과거와는 달리 이젠, 미국과 한국처럼 '배부른 돼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유전개발사업에나 눈독들이는 탓에 러시아에 돈을 뜯기기도 하는 한국이지만, 그 길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선배이고 교사이다. 러시아는 한국에 배워야 한다).  언젠가 모스크바에도 '너무 많은 극장' 대신에 (이미 많지만) '너무 많은 맥도널드', '너무 많은 식당'이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다가 정말로 우리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  

05.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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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4-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배부른 돼지'....주위엔 온통 팍팍하더이다. 그 길 이름 바꿔야하지 않겠슴까. 한줌 배부른 돼지를 만드는 길.....암튼, 어릴적부터 시 낭송회, 발레, 연극, 미술관을 다닌 아이들인데....자라서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하는데...어떤식으로 변할런지.

로쟈 2005-04-20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배부른 돼지들 주변에 허기진 돼지들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