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첫날이다. 조만간 번역 전투에 몰입해야 하지만, 그전에 또 연휴에 읽을 책을 챙긴다. 사실 다음주에나 배송이 되기에 연휴에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일은 없다. 궁하면 '오프라인' 서점으로 가야 한다. 그런 발품이 아깝지 않은 책이 나왔다.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민음사, 2013).

 

 

단연 '이주의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데, 생각해 보면 디드로의 이 희한한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전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격찬 때문이다. 바로 장본인 쿤데라의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민음사, 2013)도 이번에 같이 나왔다(우연일리는 없고 출간 시기를 맞춘 것일 테다). 초기 단편집 <우스운 사랑들>(민음사, 2013)과 함께. <자크와 그의 주인>의 부제가 다름 아닌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이다.

 

연휴를 코앞에 두고 책이 나온 탓인지 책소개는 아직 뜨지 않았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마로니에북스, 2007)을 참고하면, "놀랄 만큼 재미없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놀랄 만큼 재미없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다. 20세기에 등장하는 메타픽션처럼 끊임없이 작품 자체의 구성 과정에 대해 언급하고, 왜 이런 결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을 추측함으로써, 로맨틱한 이야기나 있음직하지도 않은 모험을 기대하는 독자들을 비꼰다. 디드로는 자크가 산책 중에 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승에게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약간의 스릴을 허용하기는 하는데, 그나마도 언제 나올 것인지를 확실하게 미리 밝혀 두었다.

디드로는 팔방미인이었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였고, 정치평론가이기도 했다.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불신과 조롱은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완성하는 데 25년이나 걸린 <백과전서>는 프랑스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가장 위대한 표현으로, 함께 작업한 공동 저자 중에는 수학자 달랑베르(1717~1783)도 있었다고 한다. <운명론자 자크>는 1770년경에 쓰여졌지만, 디드로의 살아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소위 “존재의 문제”가 자아 표현과 이야기라는 희극 무대에 올려지는, 철학적 사고로의 흥미로운 출발이다.

'팔방미인'의 작가이자 철학자 디드로의 소설로는 <라모의 조카>, <수녀>, 그리고 <입싼 보석들>이 국내에 더 번역돼 있다(<수녀>는 완역본이 나왔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 발췌본뿐이어서 아쉽다).

 



또한 다양한 예술론으로는 <미의 기원과 본성>, <쌀롱>, <배우에 관한 역설>이 번역돼 있다. <운명론자 자크>가 소개됨으로써 '디드로 컬렉션'도 얼추 구색은 갖춰진 듯 보인다. 흠, 오랜만에 서점 나들이를 해봐야겠다...

 

13. 09. 18.

 

 

 

 

P.S. 참고로 덧붙이자면,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은 여러 차례 번역된 작품집이다. 나로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음에 읽은 듯싶은데, 내가 읽은 번역본은 <우스꽝스러운 사랑이야기>(친우, 1988)였다. 그 이후에도 <우스꽝스런 사랑들>(재원, 1991), <래퍼블 러브>(작은우리, 1994), <가볍고 우울한 사랑>(거송미디어, 2006), <사랑>(예문, 1997) 등으로 완역본과 발췌본이 더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비로소 정본이 나온 듯해 반갑다. 20년도 더 전에 헤어진 친구와 재회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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