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책&(421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의사들'로 골랐다. 조슈아 퍼퍼와 스티븐 시나의 <닥터 프랑켄슈타인>(텍스트, 2013)이 출간된 게 계기였는데, 관련서를 찾다가 아툴 가완디의 책들을 발견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책&(13년 8월호)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한때 잘못 이해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에서, 실은 ‘예술’이 ‘의술’을 뜻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고, 의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까마득하구나.” 곧 ‘의술의 길은 멀다’라는 게 히포크라테스의 진의에 가깝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히포크라테스의 후예인 의사들은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낭독하며 의사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의학은 완벽하지 않으며 의술의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런 조건에서 의사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이달에는 의사들의 세계를 다룬 책을 몇 권 들여다보기로 하자.
조금 파격적인 서두는 어떨까. 미국의 법의학자 조슈아 퍼퍼와 스티븐 시나가 쓴 <닥터 프랑켄슈타인>(텍스트, 2013)은 의사들의 어두운 행각을 다룬 ‘의료 잔혹사’라고 할 만한 책이다. 원제 자체가 ‘의사는 언제 죽이는가(When doctors kill)’이다. 특별한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의사들은 집단학살과 생체 실험에서 무수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미국의 의사들도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 실험으로 많은 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가령 1943년 미국 신시내티 대학병원의 연구원들은 ‘차가운 온도가 정신이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 정신장애 환자 16명을 120시간 동안 영하 1도의 냉장실에 가두었다. 뉴욕대학의 솔 크루그먼은 1956년부터 1972년까지 한 공립학교에 다니는 정신이상 아동을 대상으로 간염 감염 연구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감염된 혈청을 주사하거나 간염 환자의 배설물을 먹여 의도적인 감염실험을 하면서도 부모에게는 간염 백신을 주사한다고 속여서 동의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크루그먼은 1972년에 미국 소아과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다. 그나마 이런 정도는 책에서 언급된 온갖 ‘범죄’에 비하면 약소한 사례에 속한다. 그렇다고 고발이나 폭로가 저자들의 의도는 아니다. “그저 의사가 언제, 어떻게 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지 그 정황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할 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닥터 프랑켄슈타인’만이 의료살인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좋은 의사들도 과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때론 나쁜 의사가 될 수 있다.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소소, 2003) 부제대로 ‘볼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이다. 외과 레지던트로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현대의학이 아직 “불완전한 과학이며, 부단히 변화하는 지식, 불확실한 정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모험이며, 목숨을 건 줄타기”라고 담담히 인정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의사도 초인이 아닌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태만에 빠질 수도 있다.
저자가 드는 사례 중 하나는 정형외과 의사 행크 굿맨이다. 솜씨가 뛰어난 최고의 정형외과의였고 의대생들이 주는 교수상까지 받았지만 과중한 스케줄에 노출되면서 그는 차츰 의료에 무감각해졌다. 가장 바쁜 의사로서 주당 100시간까지 일을 했던 굿맨은 점차 사소한 일정 변동에도 참지 못하게 됐고 환자들에게 어이없는 결정을 내리면서 의료소송에 연이어 휘말리는 ‘평범한 나쁜 의사’가 됐다.
그렇다고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한 의료 현실은 더 나아져야 하고 실제로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아툴 가완디는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동녘사이언스, 2008)에서 의료현장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으며 좋은 의사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 살핀다. 그는 의료계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핵심요소로 성실함과 도덕적 투명성, 그리고 새로운 사고를 든다. 외과의 수련과정을 마치고 인도에 교환의사로 간 저자가 하루는 중증 뇌수종(뇌척수액이 정상적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두개골을 팽창시키고 뇌를 압박하는 질환)에 걸린 한 살배기 아이를 보게 된다. 긴급한 수술이 필요했지만 신경외과 전문의도 없고 수술 장비와 무균튜브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외과의들은 열악한 도구를 이용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을 시작했고 동네시장에서 모사품 튜브를 소독하여 무균튜브를 대신했다. 그렇게 과감한 결단과 사고의 전환으로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좋은 의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의사’라고 하면 199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국경없는의사회’도 빼놓을 수 없다. 2년간 직접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신창범의 <국경 없는 괴짜들>(한겨레출판, 2013)은 전 세계 분쟁지역과 자연재해 지역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구호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더불어 베네수엘라의 공공 의료혁명을 다룬 스티브 브루워의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검둥소, 2013)은 ‘좋은 의사’를 넘어서 ‘좋은 의료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요시타 타로의 르포르타주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파피에, 2011)와 함께 읽어볼 만하다.
13. 0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