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3)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을 적었다.

 

 

한겨레(13. 08. 05) 공산주의 마을을 누가 파괴했을까

 

‘소비에트 유토피아문학의 정수’로 소개됐지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1928)는 소련에서 거의 부재했던 작품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분위기를 타고 정식으로 출간된 게 1988년이기 때문이다. 이해에는 역시나 금서였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출간돼 러시아 독자들과 만났다. <닥터 지바고>의 경우, 러시아혁명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소련에서 공식 출간되지 않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에겐 ‘반공문학’으로 읽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이념에 헌신적이었던 철도노동자 출신 작가의 대표작은 어째서 금지됐던 것일까.

 

전체 3부로 구성된 장편 <체벤구르>의 주인공은 사샤 드바노프이다.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죽음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서 두 발을 밧줄로 묶고 호수에 몸을 던졌다가 죽었다. 죽음을 마치 여느 마을에 마실을 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사샤는 아이들이 많은 드바노프 집안에 입양되지만 끼니를 제대로 이을 수 없는 가난 때문에 구걸에까지 나선다. 방랑자이자 기계공인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그를 양자로 거두며, 혁명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당원이 된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볼셰비키는 텅 빈 심장을 가져야 한다는 양아버지의 교훈을 품고서 사샤는 당의 명령에 따라 진정한 공산주의 마을을 찾아 떠난다. 당과 무관하게 자생적인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를 건설한 마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자 코푠킨이 사샤의 동행이 돼준다.

 

두 사람은 순례 길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유명인의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도 거쳐 간다. 혁명 이후의 삶은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들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되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됐다. 그리고 무엇이 새로운 완벽한 삶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건설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예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를 좋은 사람들의 모임 같을 걸로 생각했을 뿐이어서 필요한 물건이나 건물에 대해서 무지했다. 사샤와 코푠킨이 도착하게 되는 공산주의 마을 체벤구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한 이 공산주의 유토피아에서는 태양도 이전보다는 더 열심히 일할 거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이들의 ‘낙원’은 얼마나 보존될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에서 체벤구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군대의 공격을 받고서 파괴된다. 코푠킨을 포함해 동지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사샤만이 홀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샤는 언젠가 아버지가 몸을 던졌던 호수로 걸어들어간다.

 

 

비극적으로 보이는 결말은 사회주의에 대한 플라토노프의 지극한 염려를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궁금한 것은 ‘외부 군대’의 정체를 작가가 어째서 모호하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로서 적은 혁명군(적위군)이거나 반혁명군(백위군)일 수밖에 없다. 체벤구르가 반혁명군에 의해 파괴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모호하게 처리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혹 플라토노프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이상적 공산주의 마을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현실사회주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현실사회주의를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로 이해하게 되면 억측은 아닐지도 모른다.

 

13.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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