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02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조엘 바칸의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알에이치코리아, 2013)을 읽고 쓴 것인데, 책의 부제는 '내 아이를 위협하는 나쁜기업에 관한 보고서'. 흥미로운 사례 비판과 경고를 담고 있어서 저자의 <기업의 경제학>(황금사자, 2010)까지 찾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아이들의 게임/인터넷 중독과 독성물질에 대한 노출은 비단 미국만의 사례가 아닐 것이기에 우리도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책에는 한국의 게임중독 부부가 방치한 바람에 영양실조로 죽은 아기 얘기도 사례로 나온다!).  

 

 

주간경향(13. 06. 04) 기업은 아이들을 이익의 제물로 삼는다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만큼 그 사회의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넬슨 만델라의 말이다. 동시에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의 저자 조엔 바칸의 문제의식이다.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삼자면 우리 사회의 정신은 지극히 염려스럽다. “거대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려고 어린 시절을 무자비하게 압박하는사회이기에 그렇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특히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두 자녀의 아버지이기도 한 저자는 일단 기업이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제물로 삼고 있는 현실을 꼼꼼하게 폭로한다. 전작인 <기업의 경제학>(황금사자)에서 저자는 기업은 언제나 이익을 창출하도록 행동하고 법적으로 그렇게 강요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기업은 이익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기에 인간으로 치면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기업이란 사이코패스에게는 모든 것이 이익 창출의 수단이 되며,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08년에 중국에서 벌어진 멜라닌 분유 파동도 비근한 예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방치되고 이용당하는 것이 빈곤국가나 개발도상국에 한정된 일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더 교묘하면서도 전면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게임이나 미디어 시장을 들여다보자. 어린이를 고객으로 한 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들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저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는 단짝을 때려눕혀라인데, 단짝이 어떤 최후를 맞을지 결정하는 게임이다. 한 각본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얼굴과 뒤통수를 가격하고 이어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얼굴에 대변을 본다. 그렇듯 잔인한 폭력과 학대, 살인 행위에서 유머와 재미를 찾는 게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들의 공통점이다. 아이들이 이런 게임과 유해 미디어에 중독되면서 부모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게다가 폭력적인 게임이 아이들의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부는 규제에 소극적이다.

 

소아정신과의 장삿속 처방도 문제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어린이 정신장애 진단과 약물 치료가 급증했는데, 많은 아이들이 정신 질환을 앓게 됐고 진단기술이 더 정교해진 측면도 있지만 실상은 의학과 의료 행위에 미치는 제약업계가 영향력이 커지면서 빚어진 결과다. 가령 하버드대학의 소아정신과 권위자인 조지프 비더먼이 소아 우울증의 경우에도 약물 치료가 효과적이라고 주장하자 그 진단과 치료가 40배나 증가했다. 비더먼은 제약회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기업들에 유리한 연구결과가 나오게 하겠다고 미리 약속하고 지원을 받은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에 의회가 산학협력을 명분으로 의학 연구에도 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하자 의학계와 제약 업계가 공생관계가 됐다. 다루기 힘든 아이들은 무차별적으로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고, 마음의 감기를 앓는 아이들을 따뜻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약물 치료 대상이 됐다.

 

그밖에도 어른에게는 무해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유해 화학물질들이 제대로 규제되고 있지 않는 일, 최저노동 연령이 12세로 낮춰짐으로써 아이들이 학업이 아닌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는 일, ‘낙오자 없는 교육을 한답시고 일제고사를 실시함으로써 시험 출제 업계의 배만 불려놓은 일 등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경제이념이 되면서 기업 이익 우선주의가 모든 것을 잠식해버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부모의 걱정만으로는 구제 불능이다. 대신에 저자는 우리가 시민으로서사회를 바꾸려는 집단적인 노력, 곧 민주주의에 동참할 때만이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기업사회의 실상을 직시하려는 노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13.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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