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343호)에 실은 리뷰도 옮겨놓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다' 특집인데, 내가 청탁받은 건 세 권의 인문서에 대한 검토였다. 제목에 모두 '인문학'이 들어가 있어서 '인문학 책'이라고 따로 작명을 했다(원래 쓰이는 말인지는 긴가민가). 불황 속에서도 읽히는 '인문학 책'의 매력과 아쉬움을 적었다. 그러고 보니 기획회의에는 상당히 오랜만에 글을 싣는다.

 

 

기획회의(13. 05. 05) '읽히는' 인문서의 시대

 

인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행히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 ‘최근 인문학 분야 도서 중 어떤 책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짚어달라는 게 <기획회의> 편집자의 주문이기에. 인기 인문서의 원인 분석을 해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향방에 대해서도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란 불길한 예감도 든다. 인문학 책이 왜 읽히고 있으며(더 정확하게는 왜 팔리고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더듬다 보면,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 곁의 인문서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점검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거창한 문제는 일단 덮어두기로 한다. 나로선 부족한 역량과 분량을 얼마든지 핑계로 댈 수 있다. 익숙한 게 믿는 구석이다. 그냥 앞가림만 하기로 하자.  

 

통칭하면 ‘인문 분야 도서’이고 ‘인문서’이지만, ‘인문학 책’이라고 특정하게 되면 제목에(적어도 부제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책을 별도로 가리킨다. 이게 ‘업계 용어’로 등재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거기에 준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책들인가. 가령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서도 <숲의 인문학>(글항아리) <홍루몽 인문학>(휘닉스) 같은 제목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으며 심지어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 <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열린어린이) 같은 제목도 충격적이지 않다. ‘인문학’의 오지랖이 넓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해줄 만하다. 인문서는 안 팔리는 책의 대명사이지만 특이하게도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란 말은 독자를 유인하는 매끈한 미끼로 간주된다. 인문서는 안 읽어도 ‘인문학’에는 끌린다? 무슨 이유일까? 세 권의 책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일단 주현성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에서부터 시작해보자. 2012년 10월에 출간돼 10만부 이상 판매됐다고 전해지는 책이다(그 정도면 인문서로서는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제목이 말해주듯 전형적인 ‘인문학 책’이다.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이 부제. 무엇이 비결일까. 저자는 인문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경력의 출판기획자라고 소개되지만 이 책이 데뷔작이다. 기획자로서의 감각이 내용 구성에 배여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시작하는"이란 문구가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6년 대학 인문학의 위기 선언과 함께 시작된 대학 바깥의 역설적인 ‘인문학 붐’도 한 풀 꺾인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서울대의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을 소개한 CEO 인문학> 같은 책도 몇 년 전에 나왔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 시작하는"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나로선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는 ‘재정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인문학 붐과 함께 다수의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고, 스타급 인문학자들도 탄생했으며, 인문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시대의 영웅’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기술을 모두 줄 수 있다”는 말로 인문학 열풍을 더 부채질했다. 그 결과 대학 내 인문학의 위상과는 무관하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의 가치에 대해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다. ‘인문학’은 대접 받는 유행어가 됐다. 그래서 형성된 게 ‘이건 뭐지?’라는 궁금증과 뭔가 알아야 한다는 부담이 아닌가 싶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전공자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이지만 다수의 비전공자에게는 다르게 비쳤을 법하다. 그들에게 ‘인문학’이란 말은 판독해야 할 시대의 상형문자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문학, 역사, 철학 책들에 두루두루 눈길을 주어보지만 쌓이는 건 두서없는 지식이고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는 인문학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로 나열돼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등장배경이다. 더불어 "처음 만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라고도 말하고 싶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저자는 인문학과는 구면이지만, 그래도 아직 뭔지 잘 모르겠다는 독자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동안 많은 교양 입문서가 나왔지만 매우 산발적이거나 한 분야의 지식에만 치우쳐 있어, 인문 교양에 욕심을 내는 초심자들에게는 꽤 긴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필요한가.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바로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체계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이다. 요컨대 체계적인 실전용 가이드북이라고 할까. ‘최소한의 인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곧바로 인문서 독서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저자가 자임한 역할이다. 그런 취지에서 고른 영역이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등 여섯 가지라는 점은 이 책만의 특징이자 개성이다. ‘인문학의 핵심 여섯 분야’를 이렇게 꼽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은 독자의 필요와 눈높이에 맞는 기획과 콘텐츠를 통해서 인문서의 숨은 독자들을 끌어낸 공로를 십분 인정해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책의 독자들이 저자의 기대대로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인문서를 읽는 즉시 소화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가장 어렵게 여겨질 ‘현대의 철학’ 장만 하더라도 저자는 비트겐슈타인뿐만 아니라 콰인, 크립키 등의 전문적인 분석철학자까지 다룬다.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인문 교양’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잡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비중을 고려하면 프로이트와 함께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상계’라는 개념에다 ‘Imagery’라고 잘못 병기한 걸로 보아(‘the imaginary’ 대신에) 저자 자신이 성급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나 의심도 든다. 소쉬르 언어학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인간 이성을 구조로 대치함으로써 구조주의를 이성에 뿌리를 둔 기존의 철학과 분명히 다른 탈근대(탈이성)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고 한 대목도 요령부득이다. 짐작엔 ‘주체’를 ‘이성’으로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싶다. 때문에 분명 ‘흥미로운 지식의 향연’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독자가 가려서 즐겨야 한다는 조건은 붙는다. 물론 그렇게 가려서 즐길 만한 독자를 겨냥한 입문서가 아니라는 게 딜레마이긴 하지만.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북드라망) 역시 제목에 ‘인문학’이란 말이 들어간 ‘인문학 책’이다.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같이 들어가 있는 건 ‘고미숙’이란 이름이 이미 하나의 브랜드라는 걸 말해준다. ‘동의보감 삼종세트’의 마지막 권으로 나온 책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와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서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은 독자에게는 가벼운 ‘몸 풀기’로 여겨지는 ‘사회비평적 에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대학이 지난 ‘지적 구심력’이 이미 끝났다는 것. “리모델링과 시설투자에 올인하는 사이, 대학은 한낱 ‘취업전선’이 되어 버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이제 대학에는 지성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대학이 지성을 포기하자 새로운 지성의 광장이 열렸고 ‘대중지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시대인가. “지식인이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지성의 주체’가 되는” 시대다. 저자는 바로 그런 시대를 주도한 대표적 인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은 그런 저자의 활달한 문체와 문제의식을 여일하게 담고 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적이란 느낌도 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라는 점에서도 그렇다(양기 덩어리인 아이에겐 음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은 서늘하다는 것, 아기를 업으면 엄마가 자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 가지 이유다). 인문학의 오지랖에 경탄할 밖에!

 

 

 

미국의 교육전문가 리 보틴스의 <부모 인문학>(유유)은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교육법’이 부제다. 고전 공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단단한 공부>나 <공부하는 삶>과 맥을 같이하고, 또한 이지성의 베스트셀러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와도 연결될 수 있는 책이다. ‘공장 교육’으로 전락한 오늘날 국가 주도의 공교육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부모가 직접 자녀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고전 공부법’을 주창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다음 세대가 역사 속 위대한 고전과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지 않는다”는 저자의 비판에 십분 공감하더라도 그의 전제까지 공유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어떤 전제인가. 부모들이야말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저자는 “12년 동안 효과적인 학교 교육을 받고도 아이들 공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정도로 기초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묻는데, 우리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고전 공부에 관심이 많은 부모는 양질의 학습 자료만 있으면 공부법을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런 학습 자료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때문에 <부모 인문학>은 부모의 책임감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더라도 그 깨달음이 우리의 교육법을 바꾸게 해줄지는 미지수다.

 

어느 분야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읽히는’ 인문서도 비결과 한계를 갖는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까. 인문 지식과 인문학적 성찰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가라앉지 않기 전에 새로운 출구를 뚫어줄 ‘인문학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니 굳이 ‘인문학’이란 말을 제목에 붙이지 않아도 인문서가 읽히는 시대를 고대한다.

 

13.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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