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자음과 모음'(12년 여름호)에 실은 리뷰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김사과의 경장편 <테러의 시>(민음사, 2012)를 '이 계절의 장편소설'로 다룬 것인데, 제목은 '시민문학과 난민문학 사이'라고 적었다. 분량상 포스팅을 미뤄놓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여 '여름 원고에 대한 겨울의 포스팅'이 되겠다.

 

 


1. 테러의 시? 어떤 글쓰기!

김사과의 『테러의 시』를 ‘이 계절의 장편소설’로 다루는 것이 내가 떠안은 과제다. 별다른 머뭇거림 없이 청탁에 응했지만, 막상 책 더미 속에서 검은색 표지의 『테러의 시』를 찾아내고는 중얼거렸다. “이건 시잖아?” 물론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김사과 장편소설’이라고 박혀 있지만, 소위 ‘경장편’을 ‘장편’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이론적 근거나 시학적 이유를 갖고 있지는 않을 터이다. 단지 문단 혹은 출판의 관례겠지. 게다가 이 경우는 너무도 노골적으로 ‘시’라고 주장하는 작품 아닌가. 어쩌면 ‘이 계절의 시’로 다루어도 무방한! 혹은 그러한 장르 규정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규범적이라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쓰기’라고 불러도 됨직한 어떤 것이 관례상, 혹은 편의상 ‘장편소설’이란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김사과의 『테러의 시』를 읽었다. 어떤 ‘글쓰기’를 읽었다. 그리고 소감을 적는다. 이 소감이 비평에 도달하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김사과의 어떤 글쓰기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전례가 없진 않다. 세잔은 사과 비슷한 무언가를 그려놓고 “사과가 돼라!” 주문을 외쳤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사과를 그린 게 아니라 사물을 그렸다는 얘기다. ‘테러의 시’는 어쩌면 작가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테러의 시가 돼라!”는 주문 말이다. 테러의 시? 『테러의 시』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적 상상력과 시적 자유와 시적 의미에 대해 상기하도록 해준다. 아니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게, 읽어달라는 게 또한 작가의 주문일 거라고 믿는다. 나는 별다른 머뭇거림 없이 이 주문 또한 받아들인다.


2. 어느 도시의 묵시록

“내려다본 도시는 사막과 구별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테러의 시』는 시작한다. 그리고 미리 앞지르자면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서서히 문이 열리고 문득 제니는 자신이 여전히 서울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로 끝난다. 처음에 ‘내려다본 도시’의 시점은 신의 시점일까? 제니는 물론이고 아직 어떠한 인물도 등장하기 이전이라, 인물의 시점을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인물이 내려다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니 이 시는 신의 시점으로 시작하여 인간의 시점으로 열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점의 육화가 이루지는 소설. 제니는 ‘여전히’ 서울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독자는 ‘비로소’ 이 소설의 배경이 서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이 주기, 혹은 반복 사이에는 어떤 동일시가 작동한다. 이야기가 좀 진행되고 나서야, “내려다본 도시”가 황사에 묻힌 중국의 한 도시라는 걸 알게 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러한 사실은 배제하거나 축소했다. 애초에 “내려다본 도시는 사막과 구별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에서 ‘사막과도 같은 서울’이란 이미지를 떠올린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서두를 다시 들여다보자.

 

내려다본 도시는 사막과 구별되지 않는다. 끝없이 늘어선 가로등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말라 죽은 선인장처럼 보인다. 모래가 눈꽃처럼 흩날리는 거리를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춘다. 도시 전체가 노란 꿈에 잠겨 있는 듯하다. 그것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9쪽)

 

모래 바람에 묻힌 도시를 사막에 비유하는 것은 특이하지 않다. 가로등은 당연히 말라 죽은 선인장을 연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모래가 눈꽃처럼 흩날리는 거리”란 비유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렵다. 일단 색채 이미지상 맞지 않는다. 그리고 감각(촉각)상으로도 이질적이다. 작가는 그런 이물감까지 계산에 넣은 것일까. ‘노란 꿈’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이 꿈의 주체는 누구인가? 도시이거나 도시 사람들이어야 한다. 노란 꿈? 황사가 노란가? 노랑은 매춘을 암시하는 색깔이기도 하지만, 그런 연상은 ‘꿈’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는 규정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 전체를 지시하려면 ‘이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제한적으로 앞에 나온 ‘노란 꿈’ 정도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색’은 노란색이다. 노랑은 혹 돈을 뜻하기도 할까?

 

자본주의에 대한 ‘테러’로도 읽히는 『테러의 시』를 되읽는다면 그런 추측도 가능하다. 이어지는 “노랗고 거대한 꿈이 도시를 모래에 파묻는다.”는 예언적 문장을 황금을 좇는 ‘노랗고 거대한 꿈’에 묻힌 도시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멸망해가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에 멈춘다. ‘노랗고 거대한 꿈’은 황사에 대한 비유에서 크게 진전되지 않기에(결말의 환각 장면에서 “제니와 리의 머리 위로 모래가 폭우처럼 퍼붓고 있다”라는 이미지가 한 번 더 상기시켜줄 따름이다). 아니 작가는 ‘작품’이란 프레임으로 읽히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모티프나 이미지의 유기적인 발전을 일부러 시도하지 않기. 김사과는 ‘전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한다. 그는 파편을 지향한다.

 
가령 “노란 연기 위로 모래가 흩날린다. 큰 모래 뭉치가 다 익은 과일처럼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터져 나온 모래가 피처럼 바닥을 적신다”라는 대목은 어떤가. ‘과일처럼’이나 ‘피처럼’이란 비유는 ‘떨어진다’와 ‘터진다’라는 술어 차원에서만 원관념(모래 뭉치, 모래)과 연관성을 갖는다. 물론 그런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모범적인’ 비유는 아니다. 모래 뭉치와 과일, 그리고 모래와 피 사이의 이질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색깔 이미지상으로도 그렇다. ‘다 익은 과일’의 색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쳐도,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와 ‘노란’ 모래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작가는 밀고 나간다. 그것이 마치 전략인 것처럼.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모래가 전진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모래에 덮여 정지한다.”(10쪽)


3. 제니 이야기

이야기를 진행시켜보자. 중국의 연변 정도로 추정되는 황사의 도시에서 조선족 제니는 ‘아빠’에게 성폭행당하고 인신매매업자에게 팔려서 서울로 오게 된다. ‘제니’는 처음 (   )로만 등장한다.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제니’는 (   )가 인물로 호명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다른 소설(『미나』)의 전례를 따르자면 『테러의 시』는 『제니』란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일단 제니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이때 제니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편적 특수성의 이름이다. 제니를 사들인 인신매매업자의 트럭에는 ‘제니들’이 가득하다. “남자가 트럭의 화물칸을 연다. 거긴 이미 제니처럼 커튼에 싸인 채 버둥거리는 여자들로 가득하다.”(20쪽)

 

그 트럭을 타고 제니는 황사로 뒤덮인 ‘에어로졸’ 존을 빠져나온다. 그러고는 ‘더 나쁜 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모래는 없지만, 더 나쁜 도시, 서울로. 서울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제니는 진저라고 불린다. 조선족 여자와 자고 싶어 하는 조선족 남자들에게 인기 있다.”(32쪽) ‘난 그런 거 몰라요’라고만 말하는 제니는 서울 외곽의 불법 섹스클럽에서 일하는 ‘조선족 창녀’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돈, 여자, 섹스, 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41쪽)


이런 주인공에게서 작가는 어떻게 ‘테러의 시’를 끄집어낼 수 있을까. 변화 혹은 각성의 계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데, 작가는 두 남자와의 만남을 장치로 동원한다. 하나는 처음 ‘남자3’으로 등장했던 고위공무원 ‘정 박사’이다. 그는 한 섹스파티장에서 처음 제니를 만나고는 다시 찾아와 섹스파트너로 삼고, 여러 용도의 가정부, 곧 하녀로 삼는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조선족 제니와 달리 정 박사는 한국인이라 어느 정도 판별이 가능하다. 그의 처지는 이렇게 간추려진다. “남자는 몇 년 전 술집 마담과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나 이혼당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포기하고 위자료를 받아 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65쪽) 아이들에게서도 소외돼가는 이 중년남은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니에게 집착한다.


한데 자칭 고위공무원이 중국인 가정부에게 무시당한다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독자로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인물에 대한 희화화로 읽을 수도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속생각을 작가는 이렇게 귀띔해준다. “청와대는 나를 신임하고 있다. 몇 년만 더 고생하면 장차관 자리 하나쯤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국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나서 미련 없이 은퇴할 것이다.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돼지나 치며 소박하게 여생을 보낼 것이다.”(68쪽) 이러한 서술은 인물의 피상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리얼리티 또한 잠식한다.

 

내적 독백이 “몇 년만 더 고생하면”이라거나 “국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같은 공식적이고 상투적인 문구로 채워지진 않는다. 게다가 숙제 한 번 밀린 적 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부와 명예, 권력”을 얻은 남자가 돼지를 치며 여생을 보내리란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공무원이 “부와 명예, 권력”은 어떻게 얻었을까? 그리고 아직 장차관도 아닌 공무원이 ‘부’는 어떻게 갖게 됐으며 ‘명예’는 또 어떻게 얻은 것일까. 어떤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일까. “지금도 길에 나가면 내 명함과 자동차를 보고 따라올 젊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 있다”(67쪽)라는 자신감에 이르면 과대망상 수준이다. 그는 ‘젊고 예쁜 여자들’이 아니라 고작 조선족 여자를 돈을 주고 사서 연애하는 인물 아닌가.


‘정 박사’의 리얼리티는 미심쩍지만 어차피 그의 역할을 제니와 리의 연결고리 정도이다. 거기서 좀더 나간다면, 한국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내적 공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겠다. ‘토니’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 리는 정 박사의 아들 재준의 영어 가정교사다. 리는 제니가 자신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느끼고 자신이 그녀를 구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구원의 손길을 처음엔 거절하지만 제니는 결국 정 박사를 떠나 리에게로 간다. 나중에 리가 간증을 통해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이 아닌 동물로 키워졌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동물로 키워진 적이 있는 인간들은 서로를 알아보죠.”(167쪽)라고 그는 말한다. 마약딜러였던 아버지에게 개처럼 키워진 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인 런던을 떠나 아시아 여러 곳에서 영어강사 생활을 전전한다. 그러다 낙착한 곳이 서울인데, 자신이 만나본 많은 한국인들처럼 리 또한 한국을 증오하지만 떠나지는 못한다. 그러던 차에 ‘같은 종류’인 제니를 만난 것이다.

 

리가 사는 곳, ‘페스카마 15호’로. 버려진 건물의 ‘실내바다 낚시터’ 이름이었다고 하지만, 페스카마란 이름은 1997년 8월 조선족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 7명을 살해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가져온 것일 터이다. 그곳은 돈이 없고 직업이 없고 가족이 없는 이들이 모여들어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요컨대 ‘난민’들의 아지트이다. “그러니 제니가 그곳으로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106쪽) 페스카마 15호에서 제니는 리가 한국에서 육 년째 불법체류 중인 마약중독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매일 밤 지하에 모여 마작을 하고 제니는 리의 어깨에 기대 존다. “내가 구해줄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리가 제니에게 해주는 건 별다른 게 없다.

 

제니를 구해주는 건 차라리 리의 공간 페스카마 15호이다. 거기서 제니는 68혁명에 관한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작가는 ‘육팔 혁명’이라고 적는다). “그녀는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한다.”(108쪽) 제니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한지에 대해선 의문이 들지만 이 독서의 경험은 제니를 변화시키고 각성시킨다. “책에는 천구백육십팔 년, 프랑스, 독일, 일본, 혁명, 학생, 노동자, 젊은, 신좌파, 사랑, 상상력 같은 말들로 가득하고 제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 불타오르는 파리 제4대학이 보인다.”

 

불타오르는 파리 제4대학의 광장에는 상상력, 자유, 프리섹스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흥분한 학생들이 거리를 몰려다니며 닥치는 대로 상점을 부순다. 제니도 그 거리에 있다. 제니는 이미 학생들이 한 차례 쓸고 간, 어느 부서진 상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장갑과 모자, 스타킹을 파는, 숙녀들을 위한 오래된 상점이다. 반으로 쪼개진 커다란 거울이 바닥에 누워 있다. 제니는 허리를 굽혀 그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제니는 리와 아주 닮아 있다. (108~189쪽)

 

제니에게서 리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서 일종의 대타자이고 자아-이상이었다. “거울에 비친 제니는 리와 아주 닮아 있다”라는 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리의 시선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제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갖게 됐다. “그렇다. 아빠가 여전히 모래에 묻혀 있다. 정 박사님도. 필리핀에서 온 여자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 제니를 구해야 한다. 제니는 주먹을 꼭 움켜쥐고 상점에서 뛰쳐나온다.”(109쪽) 책이라곤 접해보지 못했을 듯싶은 한 조선족 여성이 68혁명에 관한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이러한 각성에 도달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소설이 아니라 ‘시’에서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놀라운 것은 제니가 68혁명의 주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반(反)휴머니즘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물론 휴머니즘 비판의 근거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이라는 한계 안에 머문다는 인식이다. 제니는 부엌이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발견한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제니가 썩은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넣고 씹는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맛. 휴머니즘 그 자체. 휴머니즘의 핵심.”(110쪽) 이러한 발견을 시적 에피파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니는 이 모든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고 깨끗이 세척한다. 제니의 방식으로 수행하는 혁명이고 혁명의 의식이다.

 

제니는 집 안 전체의 휴머니즘을 세제를 뿌려서 말끔히 제거하고 거품 목욕을 한다. “살짝 벌어진 입을 보면 그녀가 지금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1쪽) 이런 장면에서 제니는 적어도 의식상으로는 ‘대자적 난민’이고 ‘해방된 제니’다. 인간적 소외를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여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의 여주인공 베라가 꿈에서 여신이 된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에 상응한다). 페스카마 15호의 노동절 행사 때 ‘젊은 예술가’가 제니에게 바치는 시를 낭송하는 것은 따라서 시적 논리상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러한 자기 해방에 이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인간 해방이다. 이 인간 해방의 기획은 『테러의 시』에서 마약중독자 리의 ‘거짓말’을 통해서 제시된다. 리는 젊은 예술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도시 문명 재생 사업’의 조직원으로 한국에 왔다고 주장한다. 그 사업은 테러의 형식을 가질 수도 있다. 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분명해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거죠. 그래서 흔히 세계의 자본주의 핵심 지역, 그중에서도 핵심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곳들, 런던, 뉴욕, 도쿄 등에 사업의 역량을 집중시켰어요. 그러다 몇 년 전 우리 조직의 윗선에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죠. 지금 자본주의 체제의 최전선이 어디일까? 뉴욕? 런던? 싱가포르? 아뇨, 남한의 서울이라는 결론이 났어요. (125쪽)

 

만약 ‘지속 가능한 파괴’를 모토로 한 이러한 ‘재생 사업’ 이야기가 판타지의 형식으로라도 더 진전된다면 『테러의 시』는 말 그대로 ‘시’가 됐을 것이다. 숭고하거나 풍자적이거나. 하지만 제니와 리의 상상세계와 저항 공간은 ‘현실’의 침입으로 인해 와해된다. “그리고 그날 밤 시와 건설 회사에서 동원한 깡패들이 페스카마 15호로 들이닥친다.”(144쪽) 사람들은 쫓겨나고 건물은 포클레인에 의해 부수어진다. 결국 서울에서 가장 부유한 구역의 고시원으로 터전을 옮긴 제니와 리는 다른 조선족 여자의 권유에 따라 철야 기도회에 나가고 목사의 권유로 신앙 간증에 나서게 된다. 교회가 서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 교회를 채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서울은 십자가의 도시이지만, 역설적으로 구원과는 가장 거리가 먼 도시이기도 하다. 제니는 간증을 위해 매번 새로운 도시에 가지만 “목사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신자들은 모두 똑같은 눈으로 제니를 바라보며, 벽에 매달린 스크린은 모두 같은 회상의 제품이다. 스크린처럼, 사람들은 모두 같은 회상의 제품이다.”(178쪽)


『테러의 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비참한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돈을 받고 간증을 하며 ‘좋은 구경거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니와 리는 매주 서울 시내의 교회를 돌며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이야기는 거듭될수록 그럴듯해진다.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슬퍼지고,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176쪽) 이어서 밝혀지는 것은 대형 교회의 목사가 애초에 제니가 있던 클럽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보기 드문 냉소가 아닐까. 물론 작위적 설정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기도 하다.


4. 시적 정의

작가는 무엇을 냉소하고 부정하는가.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서 서울을 혐오하지만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자기 해방에서 인간 해방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그는 부정한다. 68혁명에 관한 책을 읽고서 각성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니의 불행한 삶을 온전하게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제니는 다시금 섹스클럽의 창녀가 돼 두 번의 낙태수술을 받고도 ‘여전히’ 서울에 있다.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다. 환각제로만 버텨내는 것이 그녀의 삶이다.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 “시내에는 연일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를 낀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미쳤다. 대부분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203쪽)


만약 그게 현실이라면 소설은 어떤 결말을 가질 수 있을까. 김사과는 한 번 더 시적인 전환을 감행한다. 소설적 연속성에 맞서는 시적 단절 혹은 도약이다. 리와 제니가 각각 병원과 클럽에 사라졌다는 진술에 이어지는 것은 『테러의 시』에서 지배 계급의 두 대표격인 정 박사와 목사의 죽음이다. “며칠 뒤 한강 변의 고급 빌라에서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던 한 고위 공무원이 목을 매 자살했다.”(204쪽)라고 정 박사의 죽음을 전하며, “그 다음날 한 대형 교회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해 목사를 포함에 다수가 불에 타 죽거나 질식사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중상류층이다.


리와 제니가 사라진 것과 고위공무원의 자살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잘 연출됐다는 인상을 준다. “거실 한가운데 매달린 그의 시체를 일곱 개의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204쪽)라는 묘사 때문이다. 이 조명은 그의 집 거실에 있는 유명 미술가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 “빈민가의 철거 예정 건물에서 뜯어낸 콘크리트 벽의 잔해 일부를 천장에 얼기설기 매달아 놓은 것”(72쪽)으로서 “런던 북부 빈민가 출신인 예술가의 정체성과 세계와의 투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이름이 ‘위트 있는 소의 크기’이고 일곱 개의 조명이 그것을 비추고 있다. 정 박사의 자살은 곧 ‘빈민가 출신 예술가의 정체성과 세계와의 투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인 셈이다.


대형 교회의 화재 사건도 시적 인과성 혹은 시적 정의를 구현한다. “시간도 날짜도 장소도 지워진 어느 날” 제니와 리는 약에 취해 환각상태에 빠진 채 자신들이 ‘공연한’ 또 다른 무대를 떠올린다. 무대 한가운데 목사가 묶여 있고 그들은 심문한다. “그 거지를 누가 구해주나요? 나는요? 나와 리는 누가 구해 주나요?”라는 게 제니의 질문이다. 그녀는 기름을 붓고 성냥을 던진다. 환각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그들이 가까이 왔어”라고 리가 속삭인다. 그들을 체포하러 온 그들일 수도 있고 죽음의 사신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기다린다. 문 너머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219쪽) 시적 정의는 그렇게 구현된다.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5. 난민문학의 현단계

“김사과의 그로테스크는, 시쳇말로, 쩐다”라고 서동진은 적었다. “김사과의 새 소설 『테러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 단어면 충분하다. 테러, 시, 그리고 김사과.”라고 금정연은 말했다.(금정연,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 ‘소녀의 외침’ 이후!」, 프레시안(12. 03. 03)) 나는 여러 복합적인 정서를 유발하는 이 소설, 혹은 시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적어보려고 했다. 모래에 파묻힌 도시의 이미지에서 시적 정의에 이르는 여정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서울에 있는 것인가? 김사과의 『테러의 시』에서 나는 무엇을 읽은 것인가. 이 이종적인, 무규칙적인 글쓰기를 읽어가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건 조르조 아감벤의 말이다. 대략 20년쯤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테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리고 적어도 국민국가와 그 주권의 와해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난민은 오늘날 도래하는 정치공동체의 형태와 그 한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이다.(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25-6쪽.)


『테러의 시』 의 두 주인공 제니와 리는 물론 전형적인 난민의 형상이다. 토니(리)와의 영어 과외 중에 재준이 규정하는 바에 따르면 제니는 ‘불법 이민자’로서 여권도, 나라도, 가족도, 직업도 없는 사람이다. 조선족 제니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중국 사람도 아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제니 자신의 발견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간증 자리에서 제니는 문득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179쪽)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에 그녀는 (   )로 지칭됐었다. 그것은 곧 어떠한 주체화 이전의 주체를 가리킨다. 난민이 바로 그런 주체의 형상이기에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유일한 범주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테러의 시』에서 이 정치적 주체는 아직 가능성으로만 형상화된다. 제니와 리의 ‘투쟁’은 자각적이지 않으며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들이 과연 새로운 정치적 투쟁과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테러의 시’가 아닌 ‘테러의 소설’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 ‘소설’이란 말은 잠정적인 명칭이다. 루카치의 말대로 근대소설이 ‘부르주아 계급의 서사시’라면, ‘난민문학’은 ‘시민문학’과는 다른 종류의 미학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김사과 소설’은 그러한 난민문학의 한 가지 형태로 가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의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이제 물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전투적이며 얼마나 강한가이다. 얼마나 실험적이며 얼마나 유효한가이다.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김사과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보기로 하자.    

 

1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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