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차례씩 진행하는 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의 일부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206144638§ion=04 참조). 이달의 읽은 책은 오항녕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이다.

 

 

 

프레시안(12. 12. 07) 2012 광해의 맨얼굴, 박정희인가 노무현인가?

 

(...)

 

김용언 :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읽다가 광해군이 폭군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다른 의미로서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칠게 표현했을 때 일반적으로 성군으로 꼽히는 정조나 세종대왕이 인문학적 왕이라면 광해군은 어떤 점에선 이과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궁궐 중축만 해도 물론 본인의 안전에 대한 신경증적인 집착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 외에도 궁궐을 짓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거든요. 중국에서 무슨 원료를 수입해라, 기와는 이런 걸 써라 하면서 본인이 하나하나 다 따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토건이나 건축, 혹은 나중에 나오는 외교적인 문제까지 광해가 관심을 갖는 건 문과적인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조선이 요구했던 왕은 아니라도 그 자체가 좋은 장관 내지는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조선에는 문치주의라는 강고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경연을 거부하고 다른 분야에만 집중했던 이 사람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제 인상 비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들께선 광해가 어떤 왕이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권우 : 오항녕 교수는 경연의 힘을 중요시하지만 한명기 교수는 그다지 크게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전작 <조선의 힘>에서 강조했던 조선 문치주의의 힘에 대한 연역적인 방법으로 광해군을 본 측면이 있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경연에 대해선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라는 책을 참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는 기대승의 <논사록>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가 번역되어 실려있는데요. 거기 묘사되는 경연의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학>의 몇 구절을 놓고 왕과 신하들이 함께 토론해요. 양쪽 다 고전에 대한 이해가 되게 높은데, 고전의 한 두 구절을 놓고 원뜻이 무엇이었는지, 중국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됐는지를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조선 현실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경연은, 고전에 비추어봤을 때 오늘의 정치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팽팽한 논쟁인 거죠. 임금은 제자가 되고 신하가 스승이 되면서 팽팽한 새로운 균형이 이뤄져요. 현실의 힘과 이상의 힘이 동시에 관철되면서 아주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진다는 거지요.

 

그런 걸 봤을 때 오항녕 교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설득당하고 설득하면서 거기서 도출되는 합의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과정에서 경연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대체로 폭군들이 경연을 등한시 하죠. 연산군도 경연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대리 출석시켰다는 거 아닙니까. (웃음) 대체로 경연하라고 요구하는 건 신하들이고요. 원활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합의 시스템을 요구하는 거라고 전 느꼈어요. 그런 면에서 광해가 즉위 초반부터 왕권 위협 세력들에 대해서는 직접 친국을 가할 만큼 열성적이었는데 경연 자체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현우 : 왕권 견제 장치로서 문치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지요. 조선이 왕조 국가이긴 하지만 동시에 선비들이 지배했던 나라잖아요. 그게 권력의 전횡을 제한하는 효과도 가져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개혁이든 지지부진하게 만들기도 했죠. 대표적인 예가 대동법일 텐데요.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 지역에 한정해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요. 결국 5년 만에 흐지부지되면서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고요.

 

광해군 자신이 여기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가 있어요. 광해군의 지지 세력들이 방납(防納 : 일정한 대가를 받고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대주는 전문 업종)과 관련된 폐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뒤집어서 얘기하면 광해군의 실패는 광해군이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왕권을 좌지우지하던 당대 권신들 때문이기도 하죠. 그 잘못을 광해군에게 다 전가시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광해군이 조선 왕들의 평균보다도 못한 왕이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실리 외교도 그렇습니다. 파병할 때 후금에 비밀리에 전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공식적인 외교 노선이 될 수 없었죠. 왜냐하면 대신들 대부분이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에요. 저는 그런 것을 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해군은 우리가 배운 것만큼 개혁 군주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 오항녕 교수가 얘기했던 문치주의라는 조선의 힘이, 그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권우 : 문치주의 시스템 내에서는 상대방의 주도권을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광해군 시절에는 문치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옥사가 자주 발생했죠. 저는 문치주의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광해군과 그의 지지 기반인 북인들이 공동 책임을 질 필요는 있다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현우 : 전 북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선비 계급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과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폐해가 없어졌는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두 차례 호란을 불러오는 데 그쳤죠. 제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갖는 불만 중 하나는 그거에요. 광해군 이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아요. 광해군 시절의 '잃어버린 15년' 때문에 조선 후기가 완전히 망가진 걸로만 나오잖아요. 이건 좀 과도한 인과관계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권우 : 음, 그 부분은 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봐도 당시 조선은 인조 반정 이후, 기미책(羈靡策)이라고 하죠, 명과 후금 모두 도발하지 않고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폈어요. 인조 때에도 배금을 한 건 아니라고, 책에 보면 "친명의 기치는 확실하게 유지되었"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그들 역시 후금을 자극하여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명시했어요. 사실 인조 부분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선 광해군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의 가정은 가능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광해군이 권력을 유지했다면 병자호란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현우 : 적어도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요. 당연히 후금은 조선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인조 반정 이후 바로 명나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명백해지니까 그제서야 비로소 조선 침공의 명분을 찾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인조 얘기를 굳이 꺼내려던 건 아니고,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을 바로잡은 게 인조라는 결론 때문에 의문이 들어서였습니다. 인조 시기를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건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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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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