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하워드 진의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일상이상, 2012)이다. '시민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가 부제.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올해 나온 원서(<이뤄지지 않은 역사의 약속>) 자체가 하워드 진의 유작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저자가 다루는 다양한 범위의 이슈들을 축소시킨 감이 있는데, 지난 198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의 진보적 잡지 <프로그레시브>에 실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진의 마지막 저작이자 유작이 이 칼럼집인 셈이다. 책상 가까이에 있길래 아침에 무심결에 집어서 몇 쪽 읽어봤는데, 이 걸출한 역사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빼어난 교육자의 면모를 두루 확인할 수 있어서 '하워드 진 입문서'로도 아주 요긴하다 싶다.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옆에 나란히 꽂아둘 수 있을까. 한 인터뷰 꼭지에서 자서전의 제목을 왜 그렇게 붙였느냐고 물으니까 하워드 진의 대답은 이렇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이냐고? 강연장에서 나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내 자서전의 제목을 뭐라고들 잘못 말하는지 아는가? "중립적인 현장에서는 자신을 훈련시킬 수 없다(You Can't be Training in a Neutral Place)"라고 한단 말이지. 그런 점을 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중립'과 '기차', '훈련'이란 말이 서로 엇갈려 이 제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53쪽)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워드 진의 가장 큰 미덕은 모든 이슈들에 자신의 관점을 아주 쉬운 언어로 명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인데, 가령 진보의 핵심 가치로서 평등주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적 가치의 핵심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있다는 생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 어디에서든 불평등은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덧붙이기를,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평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현실에서 성취하기엔 어렵다.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는 내가 입고 있는 스웨터보단 좋다. 그러나 우리가 둘 다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 그게 중요하다."(11쪽)

이런 '스웨터론' 같은 언어가 우리에겐(더구나 요즘 같은 대선 국면에선) 더 많이, 그리고 절실하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진은 상당히 많은 분량을 반전에 대한 열정적 옹호에 할애하고 있는데, 번역본 제목의 빌미가 된 '2000년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거짓말'에서는 당시 미국 대선후보들의 대외 정책 공약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대외 및 군사 정책에 대해서는 아예 무슨 변화에 대한 말 자체를 입밖에 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모두가 정당소속을 불문하고,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국방부를 지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력 증강을 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습게도 이건 무슨 육체미 과시하는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 나가 근력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보다 많은 바디 빌딩 기구를 사겠다면서 우리에게 그 돈을 다 내라고 하고,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면서 동네 뒷골목에서 다른 애들을 죄다 괴롭히고 자기가 대장인데 지면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고 우기고 있는 식이다.

우리가 진정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라면, 전 세계 인구의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미국이 전 세계 부의 25퍼센트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수 있겠는가? (...) 미국인들을 뺀 나머지 전 세계 인구 96퍼센트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바로 우리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존심이 있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어떻게 지지를 표명할 수 있겠는가? (94쪽)

에둘러 말하지 않으며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2000년 대선이면 좀 지나간 시점의 얘기지만, 그렇다고 시의성이 만료된 것도 아니다. 최근의 미 대선과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대선에 적용해봐도 그렇다. 진의 말대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두루뭉술하게 '좋은 애기들'만 늘어놓기보다는 좀더 확실하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공표하는 후보가 앞장서 나왔으면 싶다. 어려운 가치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있다"는 걸로도 충분하다. 미국의 양심, 하워드 진조차도 가져보지 못한 정부를 우리는 가질 수 있을까. 기대와 염려가 교차한다...

 

1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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