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의 마지막 권 <희망의 배신>(부키, 2012)이 출간됐다. 서두에 붙인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배신 3부작'의 한권으로 읽어도 좋고, 중산층 문제를 다룬 책으로 읽어도 좋겠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란 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여준 것이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워킹푸어 생존기’ <노동의 배신>에 뒤이어 ‘화이트칼라 구직기’ <희망의 배신>이 이번에 번역됨으로써 <긍정의 배신>을 통해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이 완결되었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배신’이란 단어만큼 그의 책들이 전해주는 임팩트를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말도 드물다. 이 세 권의 책과 함께 ‘1%를 위한 세상’을 비판하는 <오! 당신들의 나라>까지 포함하면 저널리스트 겸 원숙한 사회비평가로서 저자가 2000년대에 펴낸 대표작 대부분이 우리에게 소개되는 셈이다.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지 여실히 보여준 <긍정의 배신>이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이었나? 저자는 자칭 ‘긍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미국식 낙관주의의 허상을 폭로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류의 자기계발서가 마치 복음서처럼 읽힌 연대가 우리의 2000년대 첫 10년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우리는 온갖 성공신화의 중독자였다(결국엔 MB정권까지 탄생시킨!). 모든 문제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되뇌면서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으로 그리면 치즈가 더 가까워진다.”거나 “과거의 사고방식은 새로운 치즈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등의 주문을 아침마다 주워섬겼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그러한 주문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던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추락하는 삶에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도.  

 

<노동의 배신>과 <희망의 배신>은 <긍정의 배신>의 전사(前史)이자 ‘에피소드’이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몸소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기에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숙식도 해결하기 벅찬 것이 오늘날 노동의 현실이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에 뒤이은 <희망의 배신>은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현실을 다룬다. 저임금 노동과는 달리 이 경우는 노동이 아니라 구직 자체가 문제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위장하여 기업체 임원급으로 취업하려고 수개월간 유료 코칭도 받고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하고 이미지 카운슬링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구직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기술과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와는 달리 화이트칼라는 ‘자기 자신’까지 팔아야 한다. “CEO가 바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행위가 불법의 경계선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일체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해야 합니다.”라는 한 카운슬러의 충고는 화이트칼라의 노동현실을 잘 요약해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희생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저자는 온갖 노력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바로 이 실패의 과정이 또한 우리 시대 중산층 화이트칼라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 고위 경영자가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앤 대가로 높은 연봉을 받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대량의 정리해고와 아웃소싱을 단행한 CEO가 그렇지 않은 CEO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이 오늘날 기업의 현실인 것이다. 저널리스트 이전에 생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그러한 현실을 ‘포식자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경영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소위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현실의 필연적 귀결이 저자가 ‘중산층 대참사’라고 부른 중산층의 몰락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년실업과 중장년층의 정리해고와 재취업난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니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배신>은 그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적어도 생쥐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각성 말이다. 

 

12. 10. 21.

 

 

 

P.S. '중산층 대참사'와 관련해서는 에런라이크의 책 외에도 톰 하트만의 <중산층은 응답하라>(부키, 2012), 그리고 조준현의 <중산층이라는 착각>(위즈덤하우스, 2012)을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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