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와 야스퍼스'란 제목을 달려다가 '심리학의 원리와 일반 정신병리학'으로 바꾸었다.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와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에 관한 페이퍼라 범위를 좁힌 것이다. 그리고 이 페이퍼는 독자의 페이퍼가 아니라 수집가(컬렉터)의 페이퍼이다. 장서가의 기준이 내가 20대에 생각했던 대로 1만권 정도라면 어느새 나도 장서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90년 가을에 복학할 때 나는 집에서 들고 온 책으로 4단 책장 두 칸도 채우지 못했었다). 하지만 장서가란 말보다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은 '책 수집가'이다. '장서'란 말이 정태적이라면 '수집'은 동태적이어서 그렇다. 방안에 있는 책도 못 찾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책탐을 버리기는커녕 줄이지도 못하는 것이 책 수집가의 고질이다.

 

 

 

오늘은 그 대상이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텟, 2005)이다. 책은 진작에 번역돼 나왔지만 사실 가격과 분량 때문에 엄두를 못 내던 터였고, 몇달 전에 다시 찾아봤을 때는 1권이 품절된 상태였다. 최근에 나온 심리학책을 읽던 중 다시 언급이 되길래 찾으니 세 권이 다 살아있다. 사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면서 나는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그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프래그머티즘>은 <실용주의>(아카넷, 2008)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제임스의 다른 글은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 2001) 등에 일부 소개돼 있기도 하다. 요는 <심리학의 원리>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실용주의> 등이 제임스의 대표작이라는 것. 이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의 책이 <심리학의 원리>여서 과연 우리말로 번역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난 2005년에도 이렇게 덧붙였다.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922쪽에 이르니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심리학의 원리> 번역본 출간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한국어본 출간 당시 아직 일본어본이 나오지 않은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번역자와 관련한 사정은 이렇다.

이번 번역본은 첫째, 국내는 물론이고 번역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아직 선보이지 않고 있는 첫 완역본이며, 둘째, 그것이 한 심리학자의 근 20년에 걸친 노작의 산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역자는 이인(里仁)이 호인 정양은(鄭良殷). 1923년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중앙대ㆍ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가 2004년 2월 8일,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그러니 이번 '심리학의 원리' 완역본은 그의 유작이다. 고전 번역이라면 모름지기 붙어 있어야 하는 '해제' 편이 이 완역본에 탈락된 이유는 고인이 미쳐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기 때문이라고 유저를 발간한 그의 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고인에게서 심리학을 배우고 다른 제자 9명과 힘을 합쳐 이번 완역본을 낸 조긍호 서강대 교수에 의하면 정양은 박사는 1986년 4월에 이 심리학 고전 완역을 시작해 99년 말에는 초벌 번역을 마쳤으며, 그 뒤 교정과 윤문 작업을 하고, 2003년 이후에는 해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인이 이 책 완역에 투신한 시간은 번역 시작을 기점으로 할 때 18년을 헤아리는 셈이다.(연합뉴스)

야스퍼스의 <일반정신병리학>이 출간된다면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고투담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지만, 여하튼 독서와는 별개로 책 수집가로서 내가 욕심을 내볼 수 있는 최대치가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나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이어서 이 두 권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더 적어보았다.

 

 

물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야스퍼스의 책이 출간되길 기대하는 마음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것이다...

 

12. 10. 03.

 

 

 

P.S.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가 심리학의 원조 저작 가운데 하나이기에 심리학사 책이 나온 게 있나 찾아보니 C.James Goodwin의 <현대 심리학사>(시그마프레스, 2005)와 D. Brett King 외, <심리학사>(교육과학사, 2009)가 눈에 띈다. 모두 대학교재용 책일 텐데, 후자는 4판(2008)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많이 읽히는 책인 듯싶다. 국내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심리학사>는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 굿윈의 책은 4판(2011)이 최신판이다. 같은 제목의 책으론 슐츠의 <심리학사>가 10판(2011)까지 나와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교재용 책들은 너무 비싸다는 게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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