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손에 잡은 책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이다(내가 갖고 있는 건 1쇄다). 영역본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외 영어본과 러시아어본까지 모두 갖고 있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만 읽고는 말았다. 번역이 별로 탐탁지 않다는 것도 독서를 계속 미룬 이유다. 그러다 <도덕의 계보학>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는 김에, 그리고 두달 전 박찬국 교수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세창미디어, 2012)도 나온 김에 다시 손에 들었다. 틈나는 대로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볼 참이다(천천히 읽기, 곧 '지독'이 목표다).

 

 

오늘도 몇 페이지 읽다가 어이없게 번역된 대목을 발견하고 웃음이 나왔는데, 다른 대목도 아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니체의 복수주의(pluralism)를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자기만이 유일신이라는 어느 신의 말을 듣고서 신들이 웃다가 죽었다는 대목을 인용한다("신들은 죽었다. 하지만 자기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어떤 신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다 죽었다."). 이게 <니체와 철학>에는 이렇게 옮겨졌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지 않건, 소위 그것이 신(성) 아닌가?"(21쪽)

대체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 '변절자들'에 나오는 것인데, 신들 가운데 한 신, "분노의 수염을 단 늙은 신, 질투의 신"이 "신은 유일하다. 그대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신을 가장 잘 부정하는 말'을 하자 다른 모든 신들이 웃어대더니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친다.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신성함이 아닌가?"(펭귄클래식판, 292쪽)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일이 아니겠는가?"(한길사판, 264쪽)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민음사판, 324쪽)

일단 손에 잡히는 번역본들과 대조해보더라도 <니체와 철학>의 번역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없다면 다른 번역본을 참고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만용인가. 니체의 가장 간명한 주장도 이해하지 못하고 <니체와 철학>을 옮기다니! 독자들이 웃다가 나자빠질 일이다. 참고로 <니체, 철학의 주사위>에서는 이렇게 옮겼다. "이러한 신성은 엄밀히 말해서 유일신 이외의 신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26쪽) 역시나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아닐까?'가 아니라 '아닌가?'라고 옮겨야 한다. 조롱의 뉘암스를 담고 있기에), <니체와 철학>만큼 헛다리를 짚지는 않았다.

 

혹 1쇄라서 그런가 싶어서 일단 개정판도 다시 주문했다(개정판은 2001년에 나온 걸로 돼 있다).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번역상태에 대해서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2.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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