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어떤 주제에 대해 써야 하나 고심하다가 '신촌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진화심리학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지 적었다. <문명이 낯선 인간>(공존, 2012)의 서문과 <인간은 야하다>(21세기북스, 2012)를 주로 참고했다.

 

 

 

경향신문(12. 05. 04) [문화와 세상]인간 본성의 비밀

 

과학자들에 따르면 중년이나 노년에 걸리는 질병이 출생 이전 사건들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영국의 한 지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과 도중, 그리고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방대한 출생기록을 조사한 결과인데, 궁핍한 환경 때문에 평균보다 훨씬 작게 태어난 아기들은 다른 아기들보다 나중에 건강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성인이 된 이들의 상당 비율이 65세 이전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된 영양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시도가 체질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몇 십 년 후에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온 것으로 본다.

환경과의 이러한 부조화가 심지어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친할아버지가 사춘기 때 대풍작으로 음식을 풍부하게 섭취할 경우 손자들의 당뇨병 발병 확률이 높아졌다. 중요한 신체발달단계에서 포식을 한 것이 정자 내 유전자에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터 글루크먼과 마크 핸슨의 <문명이 낯선 인간>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어긋남’을 뜻하는 책의 원제 ‘미스매치’는 개체가 자기 생애 초기 환경과 ‘잘 맞물리느냐 어긋나느냐’가 그 개체의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유전자와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고 할까.

 

 

 

개체적 차원에서 초기 환경의 중요성은 계통적 차원, 곧 인류사에도 적용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아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마음이 디자인되었던 석기시대의 환경과 현재의 문명 환경 사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에서 즐겨 드는 사례가 성선택(섹스)과 공격성(살인) 같은 주제다. 미국의 심리학자 더글러스 켄릭이 쓴 <인간은 야하다>의 원제가 ‘섹스, 살인, 그리고 삶의 의미’인 것도 그래서 특이하진 않다. 진화심리학이 말해주는 인간의 본성을 잘 정리해놓은 책인데, 가령 살인 환상에 대한 내용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한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누군가를 죽이고픈 살인 환상을 품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남학생의 76%, 여학생의 62%가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라고 해서 더 적은 수치가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럼 누구를 죽이고 싶어할까? 남녀 모두 대상은 주로 남성이다. 하지만 남성의 59%(여성의 33%)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환상을 갖고 있음에 반해서 여성의 27%(남성의 7%)는 애인을 살해하는 환상을 품었다.

살인 환상을 품을 가능성에 있어서는 남녀 간의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살인사건의 거의 90%는 남성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건 여성이 자신의 살인 환상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말해준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저자는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여성의 환상은 남성에 비해 일시적이다. 둘째, 여성은 폭력적 충동에 대한 억제력이 더 강하다. 셋째, 남성은 다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공격적으로 행동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다. 마지막 성향은 짝짓기에서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남성이 자연스레 발달시킨 본성이다. 수컷 공작새가 화려한 꼬리로 암컷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하여 남성이 늘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주로 10대 후반과 20대에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가장 높을 때 자신의 지배성을 과시하려고 폭력적일 때가 많다.

10대 청소년들이 20대 남자 대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신촌 살인사건’이 발생해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오컬트 카페가 원인이라고도 하고 스마트폰 채팅 갈등이 원인이라고도 한다. 혹은 더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기원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의 공격성을 조금은 제어할 수 있을까.

 

12. 05. 03.

 

 

P.S. 참고로 '살인'을 주제로 다룬 진화심리학 책으론 데이비드 버스의 <이웃집 살인마>(사이언스북스, 2006)와 국내 연구자들이 쓴 <살인의 진화심리학>(서울대출판부, 2003)이 있다. 절판된 책이지만 데이비드 버스가 쓴 진화심리학 교과서가 <마음의 기원>(나노미디어, 2005)이며, 조만간 개정판이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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