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배송된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 로이스 타이슨의 <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이다. 일단 제목도 잘 정했다. 원제대로 <현대비평이론>이나 <오늘의 비평이론>이라고 제목을 달았더라면, 비슷비슷한 책들 속에서 눈에 띄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만 938쪽에 이르니 사실 '모든 것'이란 제목이 과장은 아니다.

 

 

1장 '비평이론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읽다가 말미에서 저자의 체험적 고백과 맞닥뜨렸는데, 알고보니 뒷표지에도 인용돼 있는 대목이다. "독자들과 비평이론의 첫 만남과도 무관하지 않을 내 개인적인 일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서두를 마무리할까 한다"라고 운을 떼고서 그가 들려주는 것은 데리다와의 만남이다.

내가 자크 데리다의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란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천둥을 동반한 폭우를 피해 64년형 시보레 안에 주저앉은 채로 주차장에 틀어박혀 있엇다. 비평이론을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차 안에서 그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데리다의 글이나 폭우가 드러내는 장대한 자연의 힘에 감동받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무엇을 읽은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42쪽)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벨리주립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라고 하니까 저자가 명망가는 아니고 일급의 비평가도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평이론의 교수자나 소개자로서 역량과 장기를 발휘하게 됐다면 이런 경험이 중요한 자산이 됐겠다(<비평이론의 모든 것>도 2판을 옮긴 것이다). "무엇을 읽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던 경험에서 출발해 문제를 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에서 그는 어떤 교훈을 끌어내는가.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제법 똑똑하다고 자부했다. 학교에서 공들여서 철학을 공부했고, 빡빡하고 어려운 글도 훌륭히 '해독'해 내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이 글이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난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은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깨닫게 된 사실은, 이 문제가 단지 데리다의 사상이 난해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데리다의 사상이 난해하긴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보다 내가 데리다의 사상에 익숙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무언가를 데리다의 생각과 관련지을 수 있는 지점이 적어도 내 경험 안에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지도도 없이 길을 잃었던 것이다.(42쪽)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이해 불가'가 아니라 '접속 불가'였던 것. 엉뚱한 곳에서 접선을 시도하니 만남이 성사될 리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비평이론 독서에서 낭패감을 맛본 많은 독자들에게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발견이다. 문제는 '두뇌'가 아니라 '장소'라는 것.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방도는 일종의 '로드맵'이다. 

이런 뜻에서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앞으로 다룰 내용들로써 독자들에게 건네려는 것은 일종의 '교통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책과 함께할 우리의 노력을 '여행'에 비유하면 적절할 듯싶다.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지 않다. 지식은 우리가 지금 어떤 존재이며 앞으로 어떤 존재이고 싶은지를 말해주는 무엇이다. 지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및 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구성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과 주변 세계를 들여다볼 때 사용하는 렌즈가 바로 지식이기 때문이다. 렌즈를 바꿔 보면 보는 이와 보는 관점 모두 바뀌게 된다. 이러한 원리가 지식을 그토록 무서우면서도 해방적인 것으로, 그토록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즐거운 것으로 변모시킨다. 이론 공부는 그러한 괴로움이 아깝지 않을 만한 즐거움을 선사하며, 이론 공부에 따르는 괴로움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것임을 깨닫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43쪽)  

이론에 대한 이런 관점은 저자가 제시하는 '교통지도'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두께를 생각하면 '긴 여정'이지만 11가지 갈래길로 뻗어나간 여정이기에, 11가지 코스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것도 없다. 이론공부가 '고생길'이었던 독자들에겐 귀가 다시금 솔깃한 제안이지 않을까.

 

 

현재 문학이론 입문서로 가장 많이 읽히는 건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창비)과 레이먼 셀던의 <현대문학이론>(문학과지성사)이다. 이글턴의 책은 원서가 3판까지 나왔지만 번역본은 개정판이 나오고 있지 않은 게 흠이다. 셀던의 책도 '오늘'이란 기준을 적용하면 좀 올드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첫 걸음'의 의미는 가질 수 있겠고, 거기서 보폭을 좀더 넓혀가고픈 독자라면 <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손에 들 수 있겠다.

 

 

저자는 특별히 이론들간의 차이점과 유사점,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드러내기 위한 준거로 한 작품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는데, 그가 고른 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이다. 그러니까 책은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11가지 방법'에 대한 소개도 겸한다. 김욱동 교수가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문학과지성사, 1996)에서 시도한 것과 비슷하다. '일곱 가지'에서 '열한 가지'로 늘었으니 확장판이라고 해도 좋겠다. 각장의 말미에 '더 읽을 거리'에 대한 소개와 '중요한 이론서들'에 대한 언급도 잘 돼 있다(소개된 번역본들에 대한 정보도 충실히 제공하고 있다). 문학 혹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면 필독할 만하다(요즘 대학생들은 독서력이 딸린다고 하므로)...   

 

12. 04. 22.

 

 

P.S. 참고로 데리다의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에 번역돼 있다. 기억엔 엔솔로지 <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1994)과 <탈구조주의의 이해>(민음사, 1988)에도 번역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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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0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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