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6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를 간추리고 간단한 독후감을 보탰다. '피로사회'란 말의 의미가 선입견과는 다르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성과사회'에서 자발적인 자기착취를 통해 느끼는 피로감은 '피로사회'가 아닌 '피로한 사회'의 피로감이다('피로한 사회'는 저자의 용어가 아니다). 혹은 '피곤사회'라고 할까?..

 

 

 

주간경향(12. 03. 27)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사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의 저작이 소개됐다. 뜻밖에도 재독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다. 작년에 먼저 나온 <권력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 저자는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으로 박사학위와 교수 자격을 취득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독일에서 2010년에 출간된 <피로사회>는 그의 대표작으로 주요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고 ‘피로사회’란 말은 독일에서 아예 상용어가 됐다. 무엇이 그러한 반향을 불러온 것인가.

 

Müdigkeitsgesellschaft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독일의 독자들이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에 주목하고 공감한 것으로 본다. 과거 규율사회가 타자 착취 사회였다면 신자유주적 자본주의는 자기 착취 사회다. 이 새로운 21세기 사회를 그는 ‘성과사회’라고 부른다. 규율사회와 산업사회에 대한 분석과 철학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성과사회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규율사회의 지배적 공간이 병원과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 등이었다면 성과사회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 등의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지배적 공간의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 또한 변모시킨다. 이들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곧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자기경영’이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이다. 규율사회가 부정성의 사회로서 여전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지를 통해 사회를 규제하고자 한다면 성과사회는 긍정성을 동력으로 한다.

 

‘나는 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능력이 성과사회를 이끄는 긍정의 도식이다. 물론 핵심은 이러한 성과주체가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라는 점이다. 성과주체는 분명 외적인 지배와 착취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면서 주권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자유를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내맡긴다. 그리하여 성과 제고를 위한 과다한 노동은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게 된다. 자기 자신이 착취자이면서 동시에 피착취자인 처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게 자유의 역설이고 변증법이다.  

 

물론 성과사회에 대한 진단과 성과주체의 발견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를 통해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읽을 수 있었다. ‘자유의 의지’가 곧 자기를 구속하는 ‘자기계발의 의지’로 전화된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때 자유의 의지가 갖는 부정적 역설은 성과주체가 맞닥뜨리게 되는 자기 착취의 역설과 다르지 않다.

 

<피로사회>가 ‘문화비평’으로서 갖는 강점은 사회적 진단을 병리학적 시각을 통해서 조명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난 20세기를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의 경계 구분을 문제 삼았던 ‘면역학적 시대’로 규정한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며 이 패러다임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군사적인 장치를 통해 기술될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 이질성과 타자성은 점점 지워지고 있다. 오히려 21세기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건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과 같은 신경성질환들이다. 가령 우울증은 오늘날 성과주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물론 그러한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곧 자발적 착취의 병리적 결과로서의 우울증은 긍정성 과잉사회에 고유한 질병이다. 우리는 이 ‘우울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저자는 탈진의 피로와는 대조되는 무위의 피로, ‘근본적 피로’를 대안으로 암시한다. 그것은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막간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피로다. 성과사회 이후에 도래할 ‘오순절-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피로사회’다.

 

12.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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