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 잠시 손에 든 책은 오늘 마이리스트로 올려놓은 피터 노왁의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문학동네, 2012)다. 주로 어제와 그제 주문한 책들이 저녁녘에 한꺼번에 배송됐는데(오늘도 열 권이 넘는다), 그중 한 권이다. 찾아보니 그제 이정전 교수의 <시장은 정의로운가>(김영사, 2012)와 새로 나온 <햄릿>(열린책들, 2012)과 같이 묶어서 주문했었다.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라는 부제가 사실 책의 핵심을 알려주기에 일독은 옵션인 책이다. 조금 부연해서 "음탕하고, 사람을 살상하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현대문명을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책 정도로 정리해두면 된다. 그래도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조금 읽어보다가 번역상의 '미스'가 눈에 띄기에 적어둔다. 그전에 책에 대한 설명이 조금은 필요하겠다.

 

일단 CBS의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저자가 이런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사실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에게서 이 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바로 패리스 힐튼이다." 알다시피 한때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힐튼호텔 상속녀다. "순순히 인정하긴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나의 뮤즈는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호텔 상속녀였다"고 저자는 순순히 고백한다. 이젠 기억에도 가물가물하지만, 때는 2004년이었다고 한다. 문제의 스캔들이 터진 해가.

 

 

물론 저자인 노왁도 문제의 비디오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유는 좀 남달랐다. 비디오 화면이 초록색이라는 점이었으니까. 그건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기 때문"이고, 그는 섹스 기술이 아니라 비디오 촬영 기술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 야간 투시기법은 어떤 기시감을 안겨주었는데, 며칠 뒤에야 어디서 본 것인지 떠올리게 된다. 바로 CNN으로 생중계됐던 걸프전이다. "공중에서는 대공포화가 빗발치고 땅에서는 무시무시한 폭발이 잇따르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라크가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내 뇌리에 박힌 영상은 힐튼의 섹스 비디오와 마찬가지로 온통 에메랄드빛이었다."(16쪽)

 

 

이 발견이 말하자면 저자에겐 '유레카!'였다. 그는 "걸프전쟁과 섹스 비디오의 관계를 생각하다 문득 군에서 개발한 기술을 가져와 소비재에 접목시킨 다른 예는 뭐가 있을가 궁금해졌"고, 더 많은 사실을 캐냈다. 전쟁과 포르노그래피 기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읽은 대목. 

 

두 산업 간에 이런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강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능 인간의 기본욕구인 동시에 중요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기이기도 하다.(17쪽)

 

두 산업은 물론 '전쟁산업'과 '포르노산업'이다. 이 두 산업에 관련된 '두 가지 본능'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강한 본능"이기에 서로 유대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데 인용문에서 '두 가지 본능'을 굵은 글씨로 강조한 건 바로 앞 문장에서는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 하나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를 빼먹은 듯해서 원문을 구글에서 찾아봤다.

 

The technological savvy of these two indurstries should come as no suprise. Lust and the need to fight or compete are two of the most primitive and powerful human instincts. They are our basest needs, a duo of forces that drive many of our key actions."

"두 산업 간에 이런 유대 관계"는 "The technological savvy of these two indurstries"를 옮긴 것인데, 'technological'도 옮겨주는 게 좋았겠다. 'technological savvy'는 느낌엔 '기술적 짝짝꿍' 정도가 어울릴 듯싶다. 원문에서 두 가지 본능으로 지시된 건 "Lust and the need to fight or compete"다. 거기서 'Lust(성욕)'는 누락하고 'the need to fight or compete'만 "적에 맞서 싸우고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이라고 옮기는 바람에 앞뒤 호응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옮기면, "성욕과 전쟁욕구, 혹은 경쟁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면서 강력한 두 가지 본능이다."

 

 

이 두 가지 욕구에 물론 하나가 더 추가돼야 한다. 바로 식욕이다. 그렇게 해서 '와꾸'가 맞춰졌다. 전쟁, 섹스, 그리고 음식. 이게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란 제목이 뜻하는 바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여전히 식량을 얻고 섹스를 하기 위해 싸우고, 섹스를 하려고 음식과 선물을 이용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어느새 서로 교차하는 이 세 가지 고유 본능에 집착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부끄러운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저자가 의도한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는 어느새 '인간의 역사'를 넘보고 있는 형국이다...

 

12.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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