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관심도서는(그러니까 어제 바로 주문한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의 한계>(멜론, 2012)다. 원제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 센델의 데뷔작으로 1998년에 2판이 나왔다. 무슨 이유엔서인지 너무 고가여서 아직 구입하지 못한 책이다.   

 

 

 

번역중인 걸 알고 있었던 만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책들은 예기찮은 순간에 나타난다. 샌델의 독자, 존 롤스의 독자, 그리고 정의론의 독자들에겐 반가운 소식. <무엇이 정의인가?>(마티, 2011)에 실은 글 '도덕적 사고의 변증법과 한국사회'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샌들'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책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였다. 주로 존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이에 맞서는 공동체주의 철학자들 간의 대결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샌델은 '연소자'이지만 가장 먼저 호명되는데, 이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가 롤스를 비판하는 본격적인 포문을 연 저작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전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의 저작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저자들의 입장이었다. (60쪽)

 

 

 

샌델의 철학적 주장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도덕적 사고의 변증법과 한국사회'의 내용을 조금 더 발췌해놓는다. 내가 <정의의 한계>에 관심을 갖는 맥락이기도 하다.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와 뒤이어 소개된 샌델의 책들을 읽고 비로소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쟁점이 무엇이며 샌델은 어떤 점에서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샌델의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물론 존 롤스와의 비교이다. 이 부분은 그 자신이 데뷔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2판(1998) 서문은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2010)의 마지막에 ‘가상인터뷰’ 형식으로 번역돼 있다.)

 

가령 <왜 도덕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주의가 다수결주의의 다른 명칭, 즉 권리가 어떤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동체에서 우세한 가치에 의거해야 한다는 관점을 말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내가 지지하는 견해가 아니다.”(321쪽) 샌델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옳음(the right)과 좋음(the good)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이다. 칸트와 롤스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개념, 혹은 여러 도덕적․종교적 신념과 관련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좋음이 옳음에 대해 우선적이며 정의는 선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정의와 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해석이 존재한다. 무엇을 정의의 원칙으로 삼을 것이냐를 두고 ①특정한 공동체나 전통에서 지지를 받거나 널리 공유되는 가치, ②어떤 도덕적 가치나 본질적인 선이 후보로 제시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전자만이 통상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주의적’이라는 게 샌델의 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가 지지하는 건 후자 쪽이다. 때문에 그의 입장을 규정하자면 공동체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부합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샌델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모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권리에 대한 옹호론은 실질적인 도덕적․종교적 문제에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과, 권리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동체주의자들 모두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양측 모두, 권리가 증진하는 목적의 내용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세 번째 방법은 권리의 정당성을 그 권리가 기여하는 목적의 도덕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왜 도덕인가?>, 324쪽)

이 세 가지 입장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샌델은 언론의 자유와 관련된 사례를 든다. 가령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연설을 하거나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지역에서 민권운동가들이 가두행진과 연설을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문제다.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 시위대는 그 지역 공동체의 일반적인 의사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이 시위대의 연설을 제한해야 할까, 아니면 보호해야 할까? 자유주의자라면 기본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연설 내용과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혐오발언’이라 하더라도 연설할 ‘권리’는 ‘도덕적 선’에 우선한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지배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두 가지 시도에 모두 반대한다.

 

하지만 샌델이 제안하는 세 번째 방법은 두 가지 ‘유사 사례’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는 대량학살과 혐오를 선동하는 신나치의 연설과 흑인의 민권을 얻어내려고 한 민권운동가의 연설은 그 ‘대의’에 따라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도덕적 구별은 상식과 일치하지만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이나 권리를 공동체의 가치에서만 찾는 해석과는 다르다.”(330쪽)

 

그렇게 자유주의와도 다르고 공동체주의와도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이 샌델의 입장이다. 조금 풀어서 얘기하면, 그는  절차적 정당성만 옹호하거나 다수결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으로 미흡하다고 본다. 물론 무엇이 공동선이며 대의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논의를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공공철학적 논쟁을 강화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때문에 대화와 논쟁은 그의 ‘공공철학’의 핵심적 구성 요소이다.


12. 0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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