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택배로 받은 책은 건축 전문지 <공간>(522호)이다. 이달의 북리뷰로 김형진의 <미술법>(메이문화, 2011)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생소한 분야의 책이어서 골랐지만 사례 중심이어서 아쉬웠다.  

공간(11년 5월호) 미술법 

“법과 예술이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또 피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닐 때도 있다. 미술이 자기만족적인 행위를 넘어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될 때,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의 대상, 곧 ‘예술상품’이 될 때 미술은 법과 충돌하며 또 법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실상 법의 간섭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법의 도움은 받고 싶은 것이 ‘미술 본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로 피하는 것보다는 알아두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 아닐까.   

김형진의 <미술법>은 ‘더 좋은 방책’을 마련하는 데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저자는 지적재산권 분야를 전문 변호사로 대학에서는 미술법을 강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미술법은 “미술에 대한 법을 말하는 것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술법(Art Law)’이란 말 자체가 아직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법조항에 미술법이 특정돼 있는 건 아니므로 ‘미술과 관련한 법’으로 느슨하게 이해해도 되겠다. 사실 미술작품에 대한 저자의 정의 자체가 포괄적이면서도 느슨하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작가가 미술작품을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하는 데 분명히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미술작품”이라고 정의내리기 때문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사례지만 2001년 영국 미술계 최고의 영예인 터너상을 수상한 작가 마틴 크리드가 발표한 ‘작품번호88, 구겨서 공이 된 A4 용지 한 장’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종이를 구긴다면 쓰레기가 될 뿐이지만 터너의 구겨진 종이는 뒤샹의 ‘변기’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히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품으로 간주될 경우에는 ‘대우’가 달라진다. 통관 시 관세면제 혜택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저작권법과 여러 관련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은 미술작품이 법과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은 자료집처럼 구성돼 있다. 저작권에 관한 내용이 아무래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와 외설 문제, 미술품 관련 범죄, 미술과 전쟁, 미술과 세금 등 흥미로운 주제들도 포함돼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일부를 우리에게 반환한 사례와도 맞물려, 특히 작품의 소유권에 관한 장들이 눈길을 끈다.  

저자에 따르면 대체로 대륙법 국가들은 원소유자보다 현 소유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유럽 국가들은 도난 발생후 시효가 지나면 더 이상 원 소유자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영미법에서는 현 소유자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것과는 달리, 가령 프랑스에서는 설사 현소유자가 선의의 취득자가 아니더라도 도난 사건이 일어난 후 30년이 경과하면 원 소유자는 반환받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시효에 관계없이 장물에 대해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소 편의적인 법적용이란 인상이다. 자신이 훔쳐온 물건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남이 훔쳐간 자기 물건에 대해서는 반환청구권을 인정하는 셈이니까.   

프랑스의 사례라면 역사적 배경이 없지 않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군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엄청난 양의 미술품을 조직적으로 노획하고 약탈하여 나폴레옹미술관에 채워놓았다. 바로 루브르 미술관의 전신이다. 이렇게 약탈해온 미술품을 프랑스는 일체 돌려주지 않았다. 이와 견주어볼 만한 것이 2차 대전 시 소련의 약탈 사례다. 전쟁기간은 물론 전쟁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가운데는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약탈해온 미술품도 상당수 있었다. “소련이 보관하고 있는 많은 미술품 중에서 일부 밝혀진 발딘 컬렉션(Baldin Collection)은 약 2천 350만 달러 상당의 미술품으로 반 고흐, 뒤러, 렘브란트 등 거장의 작품이 포함돼 있었다.”   

요컨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995년부터 러시아의 푸시킨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는 이들 약탈 문화 재산의 전시가 시작됐다(개인적으론 2004년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본 인상파 컬렉션이 인상적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로선 유감스럽겠지만 미술품의 반환요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다.   

미술법이 문제되는 갖가지 사례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미술품 훼손 사례다. 지난 2006년에 벌어진 일인데 세계적인 재벌 스티브 윈이 소장품인 피카소의 1932년작 ‘꿈’을 친지들에게 자랑하다가 그만 팔꿈치로 그림을 치는 바람에 2인치 정도 파손했다고 한다. 시가 1억 3900만 달러에 매각할 예정인 그림이었다. 비록 복구하긴 했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수천 만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게 된 그는 매각 결정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냥 간직하기로 했다고 한다. 한숨을 돌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하느님, 그래도 제가 그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정말로 그의 안도에는 동감하는데, 훼손 당사자가 소장자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 ‘기념비적인’ 훼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사람 피네로 카나타라면 예외였을까.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미술품을 훼손한다는 ‘상습법’ 카나타는 피렌체의 다비드 상에서 발가락을 자르고 잭슨 폴록의 작품에 매직을 칠한데다가 몬드리안의 그림에 오물을 토한 화려한 전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세계적인 재벌이라 한들 스티브 윈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아닐까 싶다. 

11.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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