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과 함께 받은 책은 피에르 바야르의 <햄릿을 수사한다>(여름언덕, 2011)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이론서 혹은 비평서가 가능하다는 걸 서두에서부터 알려주는 책인데, 아예 그의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 픽션'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이다. '5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이미 올려놓기도 했지만, 피에르 바야르와 함께 '선더랜드행 기차'를 타고 독서여행을 해보는 것도 흥미진진할 듯싶다.  

  

한겨레(11. 04. 30) 추리소설가가 자기 작품속 범인 모른다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인은 작가가 설정한 셰퍼드 박사가 아니라 따로 있다? 셜록 홈스의 <바스커빌 가의 개>에서도 살인을 저지른 것은 ‘무고한’ 개가 아니다? 나아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 역시 숙부인 클로디어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이런 엉뚱하고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가 있다. 프랑스 파리8대학의 문학 교수이며 정신분석가인 피에르 바야르가 그다. 그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가 틀렸다> <햄릿을 수사한다>와 같은 책에서 이런 과감한 주장을 내놓고 그를 자기 나름대로 ‘입증’했다. 



그의 튀는 주장은 이것만도 아니어서, 어떤 책에 대해 신뢰할 만한 발언을 하기 위해 반드시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거나(<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시기적으로 앞선 작가가 후대의 작가와 작품을 표절하는 게 가능하다는(<예상 표절>·<한겨레> 2010년 6월12일치 10면) 등의 주장 역시 서슴없이 내놓는다. 프랑스에서 지난해 가을에 나온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이라는 최근 저서에서는 가령 <이방인>을 카프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톨스토이가, 그리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디 에이치(D. H.)가 아닌 티 이(T. E.) 로렌스가 썼다는 가정에 따라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읽는 시도를 해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상식을 거스르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열광과 비난을 함께 거느리고 다니는 피에르 바야르가 한국을 찾았다. 방한에 맞추어 나온 <햄릿을 수사한다>를 비롯해 지금까지 그의 책 다섯권을 낸 도서출판 여름언덕과 프랑스문화원의 초청으로 25일 한국을 찾은 그를 26일 만나 독특한 주장의 배경과 의도를 들어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아니라 일종의 편집증 환자의 논리에서 출발해 보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독창적이며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바야르가 스스로 고안한 세 개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면 그의 주장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추리비평’.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가 틀렸다> <햄릿을 수사한다> 세 작품은 바야르의 이른바 추리비평 삼부작으로 꼽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추리비평이란 “제대로 처벌되지 않은 문학적 살인의 진범을 드러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작품 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모든 불가사의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작가가 자기 책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렇듯, 작품에 대한 작가 자신의 완벽한 장악력을 의심하는 태도가 낳은 것이 ‘개입주의 비평’이다. “독자가 텍스트 앞에서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있지 않고, 작품에 개입해서 변형을 가하고 그 결과 더욱 공정한 세상에 적합하게 만드는 비평”이 바야르가 말하는 개입주의 비평이다. “문학작품을 비롯한 텍스트의 주위에는 수많은 잠재적 텍스트, 또는 유령 텍스트가 있다. 기존의 텍스트를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실체라고 가정하고, 그 안에 감추어진 잠재적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개입주의 비평이다.”

마지막으로, 바야르는 ‘이론적 픽션’을 추구한다. “나는 기존의 문학 및 픽션 대 이론 및 비평의 구분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와 <셜록 홈즈가 틀렸다> 페이퍼백은 서점에서 이론이나 비평이 아니라 픽션 쪽으로 분류된 덕에 반응이 아주 좋았다. 전통 인문학에서는 화자 ‘나’를 저자와 동일시하는 게 보통인데, 내 책에서 ‘나’란 자연인 바야르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내가 책의 논지를 위해 창조한 허구적 존재인 것이다.”

바야르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추리소설 <범죄>의 살인자가 작가가 지목한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을 다름 아닌 베르나노스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발표했을 때 전문가들이 경악하는 걸 보고서 “내가 바른 길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역설과 유머로 무장하고서 진리와 정의라는 이상을 좇아 문학 세계를 개선하려는 것”이 이론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글쟁이의 목표다.(최재봉 선임기자) 

11.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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