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와 김상환의 "언어에 대하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 2002)를 읽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에 대한 계발적인 사고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랑그(langue)'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아나그람 연구 등을 통해서 문제화하는 '랑가주(langage)'로서의 언어이다. 딜런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이 말하는 언어도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이다.

 

 

 

 

물론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랑그/랑가주의 구별은 불어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언어/언어할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맥락적 의미가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쉬르에게 랑가주는 인간이 가진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들(언어, 행위, 음악, 그림, 조각) 등이며, 넓은 의미의 말에 해당한다."(122쪽) 또 "랑가주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표지이며,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능력으로 간주된다."(123) 이것을 마루야마는 촘스키와는 다른 의미에서 심층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랑그는 랑가주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래서 랑가주에는 '랑그화된 랑가주'('랑가주1'이라 부르자)가 있고, '랑그화되지 않는 랑가주'('랑가주2'라 부르자)가 있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랑가주가 개별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가 되고, 특정의 공시적인 제도가 된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는 여러 언어에 공통되는 원리적 기호 체계이며,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건과 규칙의 총체인 가치체계이다."(123쪽) 그리고 이 "랑가주는 랑그 이전의 상징성의 활동으로서, 음성언어에 앞서는 원에크리튀르(archiecriture)나 코드 없는 무용인 몸짓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6쪽) 이 랑가주를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적 언어로서의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평에 대해 검토하면서 김상환이 지적하는 것 또한 이 랑가주로서의 시적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적 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게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말하는 '언어 이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기의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를 가리킨다. 언어를 이 접경적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기록의 경제학으로부터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영원한 과제이다."(129) 인용문에서 '언어 이전'의 카오스적인 질서란 소쉬르나 마루야마가 얘기하는 랑그화되지 않은 랑가주, 즉 '랑가주2'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랑가주1'과 '랑가주2'는 각각 자연언어와 상징언어에 대응할 것이다.

상징언어로서의 랑가주는 마루야마가 말하는 인간적 과잉의 산물이다. "나의 견해는 인간만이 앞에서 본 것 같은 본능의 도식 이외에 또 하나의 게슈탈트를 과잉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 분절의 결과 생기는 <언어 구분 구조>이며, 그 그물눈은 바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말에 따른 게슈탈트이다."(165-6쪽) 여기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나 '넓은 의미의 말'은 전부 랑가주에 해당한다. 그러데 이 상징언어라는 과잉, 혹은 괴물은 우리의 일상성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시어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의 일상적 자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상적 의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과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즉 절대적 언어를 상대적 언어화하여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 언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인가를 전제하는 상대적 언어는 그런 절대적 언어가 선물한 의사소통 가능성 안에서, 그러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왜곡하면서 성립한다. 문맥을 만들고 문법을 수립하면서, 지시관계를 확립하면서 절대적 언어를 상대화한다.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 그것이 자연언어의 탄생내력이다. 안정성과 도구성을 띤 자연언어는 절대적 언어의 외상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에서 유래한다."(김상환, 133쪽)

하지만 이렇듯 상대화된 언어, 상대적 언어는 메타-일상적 차원,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지평에서는 불편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인 바, 그 비판과 극복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하면서 수학적인 인공언어를 설정하는 방향이고(구조주의나 분석철학), 다른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빈곤성을 비판하면서 시적 언어, 비유적 언어, 즉 상징언어를 전면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다(니체 이후의 해체론). 전자는 자연언어에 남아있는 시적 언어의 잔재(찌꺼기)조차 말끔하게 제거하고자 하며, 후자는 '닳아빠진 동전'과도 같은 자연언어에 새로운 생명(=은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무의식의 언어)을 불어넣고자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구조주의는 어떤 변형된 이상언어론, 어떤 형식주의적 초월론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시적이거나 사적이거나 모두 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인정하지 앟는, 다만 아폴론적 개방성 안에서만 이해된 언어관에 기초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시적인 것, 그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은 객관적 형식의 질서로 환원되어 버린다."(김상환, 147쪽) 포스트-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간과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심층에서의 맹목적인 우연과 의미의 모호성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일성도 거부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영원회귀일 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을 향하여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며, 반복되는 것만이 생성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삶의 다양한 모습이며, 우연이며, 맹목적이기도 한 반복과 차이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마루야마, 257쪽) "이러한 활동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쁨은 최고의 힘을 향한 의지에 의해 <생성에 존재의 각인을 찍는 것>, 즉 카오스가 기호화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존재자>가 되어 정지하는 것도 항상 부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지포스적인 끝없는 운동의 반복이다."(263쪽) 때문에,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면, 강한 인간 - 그것은 곧 강한 시인(strong poet)에 다름아니다...

0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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