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들을 뒤적이다가 10년도 더 전에 쓴 글 중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오랜만에 읽어보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1.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이 훈김에 떤다. 화분도 난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고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김춘수, <꽃2>)

이 시는 김춘수의 다른 초기시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행위, 곧 명명행위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함부로 대상을 인식, 혹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시들에서 꽃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얼굴을 가린 신부”(<꽃을 위한 서시>)가 된다. 우리는 이 꽃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신부는 언제라도 “떨어져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내밀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 고통은 불가능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2.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남해 금산>. 이 시는 사랑의 운명, 즉 필연적인 결렬과 파국을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의 사랑은 ‘한 여자’를 ‘그 여자’로, 다시 말해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지만, 그 의미란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이것은 사랑이란 의미관계가 상호주관성에 바탕한 때문이기도 하다. 오롯한 주관성(에고)들의 밀월은 서로의 주관성이 해소․소멸되어 버리지 않는 한 너무나도 뻔한 결말에 봉착하고 만다. 사랑은 결국 ‘나 혼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3.
물론 생존기계로서의 인간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전적 사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녀 간의 짝짓기가 가능하려면 이 건장한 두 기계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서 대뇌에서는 두 기계의 원활한 접촉을 위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근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도파민, PEA 등의 호르몬으로 구성된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각성제가 작용한다)을 내보낸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작 문제는 필요 이상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경우이다. 이런 류의 사랑은 감정의 질병, 좋게 말해서 감정의 사치임을 면치 못한다. 방법은 자신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사실 나는 어떤 류의 바이러스가 이 질병의 주범인지는 언젠가 밝혀지리라 믿는다).

4.
결국 우리의 계산적인 두뇌(지능)를 믿는 도리밖에 없다. 여기서는 모범적인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①은 정현종의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이고 ②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둘째 단락이다.

①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②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①에서 “그 여자의 울음”이 나와 무관한, 그래서 적대적일 수 있는 것임은 우리가 줄곧 확인해온 바다. 그럼에도 그 울음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이 난국을 시적 화자는 “내 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해낸다. 귀를 너무 사랑해서 잘라내는 일만 없다면 그럭저럭 무난한 방법이지 싶다. ②는 아름답다. “내 사랑”의 종말을 믿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시적인 사랑의 유혹을 시적 화자는 견고한 “기다림의 자세”로 극복해낸다. 이런 건 배워둬야 한다! 그래도 당신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오호 애재라,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5.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너의 몸이 나를 감싼다. 나를 보태고도 넘치지 않는 너의 몸! 찢어지는 아픔도 피 흐르는 고통도 없는 너의 몸 속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호흡이 곤란하다. 내가 나의 몸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숨은 점점 끊어져 오고 네 몸은 내 몸을 틈없이 너무나도 꼭 맞게 마신다.
  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걸 알았을 때 내 몸은 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내 몸을 찾을 수 있을까? 너를 다 퍼내고 남은 발라진 생선가시일까? 내 몸은, 네 몸이 증발하고 남은 얼룩일까?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나는 네 몸에 젖어 있었다. 물 속의 물방울이여.

채호기의 <물 속의 물방울>. 결국 당신은 보게 된다. “발라진 생선가시”로, “얼룩”으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의 생이 ‘지독한 사랑’에 거덜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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