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한일이니까 끝을 보기로 한다. 시인 황인숙의 표현을 빌면, '빚을 까자'! 근데, 내가 누구한테 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

-5장부터이다. 170쪽. 러시아의 행위예술가 쿨릭에 대한 장인데, 그가 전시장에서 개-쿨릭 노릇을 하던 중 관람객을 무는 바람에 경찰에 잡혀갔다. 하지만 풀려났다. "무엇 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인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말이다." 해당 원문은 "Kulik was released, since it was unclear what he could be accused of."(104쪽) 역자는 이 수동문의 의미상 주어를 '관람객'(혹은 '전시회 조직위원')으로 봤는데, 나는 앞문장의 '경찰관(policemen)'이라고 본다. 즉 그를 무엇으로, 어떤 죄목으로 기소해야 할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풀려난 것. 사람을 물었으니까 고발당한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문 것이 인간-쿨릭이 아니라 개-쿨릭이었기 때문에,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오역이랄 것도 없지만,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자면 그렇다.

-171쪽. "어떤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를 창조하는 하버마스적인 이상적 담화상황..."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란 'ideal democratic universe'이다. 역자는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좀 과장이다. '이상적인 민주적 세계'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개 'universe'의 일차적 의미는 '우주'가 아니라 '세계'이지만, 역자는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자동적으로 '우주'라고 옮긴다. '상징적 우주' 정도까지는 비유적으로라도 말이 되지만, 하버마스와는 좀 안 맞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스 유니버스'를 '미스 우주'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 것처럼.

-아래쪽에 "어떤 예술가들이 폭력과 파괴를 소통의 양태로서 사용할 때..."에서 소통의 양태는 'a mode of communication'이다. '양태'가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소통의 방식'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한다. 'mode'는 무조적 '양태'라는 건, 'universe'는 무조건 '우주'라는 것만큼 뻑뻑하다.

-173쪽. 쿨릭의 협력자 '밀라 브레디키나Mila Bredikhina'는 러시아여자인 모양인데, '브레디히나'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아래의 'noosphere'는 흔히 '정신권', '정신계'라고 옮기는데('생물계biosphere' '기호계semiosphere'와 짝개념이다), 여기선 역자가 고른 '인지권'이란 역어도 적절해 보인다. 'nous'가 냄새맡는 능력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개는 얼마나 탁월한 '정신적인' 동물인 것인가!

-174쪽. '생윤리학'은 'bioethics'의 역어인데, '생명윤리학'이라고 옮기는 게 낫다. '생윤리'에서의 '생'은 '생명'보다는 '인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79쪽. 중간에 '언어 속으로 입장할 때'에서 '입장'은 'entrance'의 역어인데, 나는 그것이 오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진입'이라고 옮기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라캉네 개 이름 '저스틴Justine'은 프랑스 개니까 '쥐스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드 후작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것.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180쪽.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실제로 문자 이전에avant la lettre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에서 불어 'avant la lettre'는 문자 그대로 '문자 이전에before the letter'란 뜻이 아니다. 숙어로 어떤 이름(명칭)으로 불리기 이전에란 뜻이다(웬만한 불어사전엔 다 나오는데). 따라서 본문은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구조주의자란 말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6장. 192쪽에서 'corpus'를 '집성체'로 번역하고 원어를 병기함으로써 마치 중요한 단어처럼 과장됐다. 웬만한 개념어들에는 한자도 병기해주지 않는 역자로선 '파격적'인데, 그건 단지 corpus에 적당한 쉬운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성체'는 너무 낯선/어려운 말이다. 같은 의미라면, '모음집'(혹은 그냥 '모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영어의 'corpus'는 생각보다는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198쪽. 가운데에서 '이 적(適) 타자는..."할 때의 '적'은 당연히 'enemy'를 옮긴 말인데, 한자가 잘못 적혀 있다(골호안의 한자는 '적당하다'고 할 때 '맞을 적'자이다). 이건 생각할 여지없이 '적(敵)'으로 교정될 것으로 믿는다. 재미있는 실수이다.

-201쪽. 역자는 "saying is of the order of not-all"을 "말하는 것은 비-전체의 심급이다"라고 옮겼다. 'order'를 '심급'이라고 옮긴 것인데, 그렇게도 옮겨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203쪽. "언어는 세계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작용한다."("Language not only represents the world, but acts in it.") 내 경우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신하다'는 건, 물론 '표상하다' '재현하다'란 의미도 함축한다. 거기에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작용한다'는 '행동한다'와 좀더 경쟁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화행(speech act)이란 말도 있기 때문에, '언어가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번역은 아니다. '작용한다'란 뜻은 좀 약한 거 같다.

-같은 쪽에서. "그 대신 우리는, 잔여 속에서 바로 이 역사,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가 기입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의 원문은 "Instead we must say that in the remainder it is the antagonism of this very history, the social symbolic struggle, that is inscribed.") 번역문은 '이 역사=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적대'라고 오독하기 쉽다(나도 그렇게 읽었다). 우리말에서는 한 단어가 두 단어에 동시에 걸리는 경우, 반복해 주어야 깔끔하다. "이 역사의 적대,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라는 식으로. 그리고 원문은 강조구문이므로, 의미를 좀더 살리자면, "그 잔여 속에 기입되는 것이 바로 이 역사..."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211쪽. "남자들이 이족 결혼 관계를 시장할 때..."에서 이족은 '異族'이란 뜻이다(그런 정도는 골호안에 넣어줄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의미상 '이족간 결혼 관계'라고 하는 것이 좀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213쪽 인용문. "평등의 급무는 '우리' 역사의, 우리가 속한 역사의 이 구역의 창조물이다."(The exigency of equality is a creation of our history, this segment of history to which we belong.") 번역문은 전형적인 번역투/직역투이다. 역자도 이런 번역문을 만나면 좀 찜짐할 것이다. '평등의 급무'라는 건, 평등을 중요하고 긴급한 지상과제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약간 의역하면, "평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우리의' 역사, 곧 역사의 한 마디로서 우리 시대가 창조해낸 산물이다."

-216쪽. "왜냐하면 우리가 실재를, 즉 사회가 그 둘레로 스스로 조직화하는 그 상징화불가능한 중핵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바로 그 중핵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중핵'은 'kernel'을 두번째 '중핵'은 'core'를 번역한 것이다. 둘은 구별해주지 않아도 되는 동의어인 것인지?

-217쪽. 헤겔의 'Sittlichkeit(인륜성)'을 원어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데, 불친절한 일이다. '인륜성'이라고 옮기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주든가, 아니면 '지틀리히카이트'(맞나?)라고 음역해서 써줘야 한다.

-218쪽. "국가를 형성하는 국적들이 혼합되어 있는, 최근에 도가니melting pot 혹은 샐러드 접시salad bowl라고 불리는 미국은..."에서 '최근에'는 '샐러드 접시'에만 걸린다. 미국이란 나라가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린 건 오래전부터의 일이고, 최근에 와서 '샐러드 접시'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가니로서의 미국, 혹은 최근에 불려지는 바대로 '샐러드 접시'로서의 미국은..."

-221쪽. 각주21) '이중적 속박'은 'double bind'의 역어인데, 그렇게 옮길 수도 있지만, 'doble bind'는 베이트슨의 용어로서 '이중구속'이라 번역되고(그의 '이중구속론', <마음의 생태학>), 이미 그렇게 굳어진 말이다.

-224쪽. 각주40) 인용문에서 "자신들이 정부와..."는 "자신들의 정부와..."의 오타이다('그들의 정부'라고 해야 더 자연스럽고)...

조금 쉬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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