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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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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를 견뎌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견뎌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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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우리 삶의 소중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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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존재 Sein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 글자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 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우리의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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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포스트그램 post-gram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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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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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관심한 태도 dis-interestedness가 나에게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낳고 무성의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영화 속의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태도가 전제하고 또 확보하는 거리 dis-tance가 나의 의미론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문학이라거나 철학이라거나 하는 등속의 구분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일 따름이다. 문체란 언어의 한 묶음의 변주 variation이고, 어떤 변조 modulation이며, 자신의 바깥을 향한 언어적 긴장이다.(들뢰즈) 문체는 언제나 이질적인 heterogenous 언어 속에다 전위차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S]tyle carves differences of potential between which things can pass, come to pass...)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자주 다른 이들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감전되었던 경험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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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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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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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 파리가 아니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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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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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 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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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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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1연은 나(화자)의 사랑-이야기의 전조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이때 푹푹 나리는 눈은 이 사랑의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표시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밤주막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현실을 이 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부분은 2연의 전반부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여기서 '사랑하고' 대신에 쓰인 '사랑은 하고'란 표현은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특수화, 주제화하고 있다. '은'이라는 조사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나의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외로된 사랑이다. 즉 나는 그녀, 나타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지 않을 그녀는 눈 나리는 밤에 내가 불러낸 일종의 미적 가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님'이란 말 대신에 이 시에 이색적으로 쓰인, 러시아 여성의 이름 '나타샤'도 나와 그녀와의 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표시하며, '푹푹'(한숨소리!) 날리는 눈발 또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그의 쓸쓸한 정조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정조는 곧 반전된다. 후반부의 내용은 어느 정도 술이 오른 나의 소망사항이다. 나는 이렇듯 눈이 푹푹 나리고 쌓이는 밤에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고 꿈이다. 여기서 아마도 도회(혹은 읍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산골은 현재의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소망스런 미래의 공간이다. 나는 (현재의)도회/(미래의)산골, (현재의)현실/(미래의)소망이라는 구도를 떠올리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자신에게 독려한다. 나의 환유로서의 흰 당나귀는 이 이행의 매개자이며 보조자가 될 것이다.

3연은 소주 기운과 자신의 소망에 더욱 고조된 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2연)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3연)의 도치된 문형은 그런 정조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신감은 사랑의 주체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 나에게서 푹푹 나리는 눈은 나와 나타샤의 사랑에 대한 따뜻하고 여유로운 축복의 뜻을 강하게 갖는다. 이윽고 마지막 5연에서 나의 기쁜 마음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아름다운 나타샤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표현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한 나의 신생(新生)을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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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감상을 대강 적어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1938)는 60년 전의 시이다. 그렇지만 응앙응앙 하는 신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시로 변한 눈물들, 생각으로 변한 눈물들, 빈들거리지 않는 눈물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당신은 소주의 힘이라고 말하려는가?). 사실 우리가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매번 세상한테 (넘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는 사람 Uber-mensch이 되기 위한 바쁜 이행 Uber-gang의 와중에도 넘어지는 사람 Unter-mensch으로서 우리는 매번 몰락 Unter-gang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세상이 본래 그리 돼먹은 거라면. 우리가, 가난한 우리가 참는 수밖에. 우리가 이 운명을 사랑하는 수밖에. 이러한 운명이 너무 좋아서 응앙응앙 오늘도 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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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98. 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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