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정리하다가 몇주 전 교수신문의 기사가 눈에 띄기에 일부를 옮겨놓는다. 한국의 푸코 수용사에 대해 점검하고 있는 학술대회 발표문의 요약이다. 전공자가 바라보는 푸코 수용사의 오해와 과제가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다. 발표자는 '푸코의 근대성'에 관한 연구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은 허경 박사이다.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2003)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교수신문(10. 11. 08) 푸코 번역이 가져온 한국 지식인 담론의 변화  

(...) 푸코의 한국적 수용사에서 또 하나 검토해야 할 부분은 국내외에 널리 펴져 있는 푸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다. 우선, 푸코는 대부분 후기구조주의자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푸코 자신이 구조주의자라는 명칭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이해는 매우 도식적이다. 이는 푸코의 사유를 광의의 의미로라도 ‘구조주의적’이라 칭할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60년대 말까지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주로 푸코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서 바라보는 견해에 관련된 것으로,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 푸코를 푸코 자신이 권력-지식론을 통해 폐기처분한 진리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또는 그람시와 같은 문제틀 안에서 자주 보이는 경우이다.

셋째,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는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자신의 저작 혹은 대담에 걸쳐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스스로 근대와 근대성의 시기를 가장 중요시하는 사상가로서 그러한 문제틀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서구인인 푸코에게 자신의 곧 서구의 현대란 서구의 근대 시기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탐구는 현대를 구성한 ‘현대의 零度’로서의 근대의 탐구를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면에서 푸코에게 ‘근대’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 곧 오늘, 현대이며 따라서 푸코에게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란 하나의 사이비 문제로서 인식된다.

넷째, 하버마스를 필두로 한 헤겔주의적 이해가 있다. 이들은 푸코가 “합리주의 전통을 거부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푸코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푸코가 거부하는 것은 헤겔주의와-혹은 어떤 다른 이론과-합리성 자체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 이외의 다른 합리성은 없다는 독단적 합리성의 형식을 거부할 뿐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합리성의 형식은 늘 복수와 다수성으로서만 존재하고 나타난다. 하버마스의 푸코 비판은 근본적으로 푸코가 헤겔주의적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수의 합리성 형식들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 곧 푸코가 헤겔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며, ‘근대’ 혹은 ‘계몽’에 대한 푸코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 기반한 것이다.

수용 과정의 오해와 극복할 점들
다섯째, 좀 더 세부적인 것으로서, 푸코의 권력-지식론과 관련된 이해다. ‘지식은 어떻게 권력에 봉사했는지’, ‘문명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온 권력의 역사’라는 문제틀이다. 이는 사실상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관한 플라톤 이래 마르크스까지 이어지는 서구의 전통적 관점으로, 전통적인 자유-억압-해방의 이론틀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권력-지식론은 이와 달리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분리불가능하게 서로를 구성했으며, 그것들 각각이 서로에 대해 미친 생산적 효과를 분석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권력에 관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이른바 억압-해방의 가설을 명백히 거부 혹은 제한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푸코 수용사의 과제 상황들은 무엇일까.
1) 푸코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번역본의 확립이 시급하다.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저술들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어림잡아 보아도 프랑스 현지 저술 분량 전체의 1/3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번역의 질이라는 문제까지 더 해진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2) 푸코 사상의 균형 잡힌 이해가 요청된다. 이제까지의 푸코 이해는 사실상 ‘자신이 읽은 푸코에 한정된 이해’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혹은 푸코 전공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자신의 전공 혹은 지적 취향에 맞추어 ‘과학사가’, ‘문학비평가’, ‘권력과 지식의 철학자’, ‘고고학자’, ‘주체의 해석학자’ 등처럼 푸코의 일면을 전체인 것처럼 강조하거나, 혹은 강조점을 이동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푸코가 사용한 개념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실상 앞의 두 가지 문제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부정확한 푸코 이해에 기반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주로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으로 푸코의 주요 개념어에 관련된 저작 혹은 푸코 주요 개념어 사전의 발간, 그리고 이제까지 국내에서 저술되거나 번역된 푸코 관련 연구서ㆍ논문 등을 망라한 서지 및 일람표의 작성ㆍ발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자신이 유학한 국가 혹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국가의 일반적 연구 동향에 따르는 편향된 이해를 푸코에 대한 일반적 이해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오류의 경우가 있다. 각 연구자들은 그러한 이해가 편향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야 한다.

5)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푸코의 이론을 마치 마르크스의 지위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이론적 지주로서 신봉하거나 우상화하는 ‘식민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푸코는 결국 어떤 경우에도, 마치 이전 시대의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 혹은 베버의 경우에처럼, 그 ‘오리엔탈리스트적 함의’를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한 명의 서구 사상가에 불과하고,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허경_고려대 철학연구소)

■ 이 글은 2010년 1월 15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월례발표회,  동 학회 주최로 2010년 10월 9일 강원대에서 열린 학술대회 등에 제출한 논문들을 요약한 것이다.  

10. 11. 2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11-27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태공 2010-11-2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푸코까지도 관심 있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