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8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를 거리로 삼았다. 저자의 입문서론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번역본의 부제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저자는 프랑스 현대사상 전공인데, 약력을 보니 레비나스 번역서와 연구서를 갖고 있으며, 국내에 소개된 책으론 <하류지향>(열음사, 2007)이 있다.    

기획회의(10. 11. 05) 근원적인 물음을 제공하는 입문서

구조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1960년대 프랑스의 한 잡지에 ‘구조주의 사인방’을 그린 카툰이 실렸다. 원주민 복장을 한 네 명의 구조주의자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인데, 그들이 푸코, 라캉,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바르트였다.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란 부제를 달고 나온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표지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카툰이었다. “입문자를 위해 쉽게 쓴 구조주의 해설서”를 자임한 책이기에 또 그런 ‘친근함’에 대한 기대를 자연스레 갖게 했다. 저자 스스로 입문자용 책에는 “모든 독자를 손님처럼 맞이하는 상냥한 태도”가 있다고 적었다. 친근함에 더하여 친절함까지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책에서 본론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서문에서 피력하고 있는 입문서론인데,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알고 있는 것’을 쌓아올려 간다면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입문서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지적 탐구란 늘 ‘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닌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러한 입장에 충실하자면 전문서보다도 입문서가 오히려 지적 탐구에 더 적합한 형식이고 매체다.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고 보면, 그의 ‘쉽게 읽기’는 여느 ‘깊이 읽기’보다도 더 지식의 핵심을 건드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 명의 구조주의자들을 살펴보기 전에 저자는 1장에서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를 정리하고, 2장에서는 그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소쉬르의 언어학의 핵심을 짚어준다. 일단 그는 ‘구조주의의 종언’ 이후의 시대인 포스트구조주의 시대를 “구조를 상식으로 간주하는 사상사적 관습의 시대”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즉 구조주의 사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아니라 이미 그것이 지배적인 편견이 된 탓에 더 이상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시대다. 더 나아가 ‘사상의 관습’에 대한 이러한 성찰 자체가 구조주의의 산물이자 유산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구조주의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구조주의의 진정한 종말은 구조주의의 용어 자체를 폐기하게 될 때, 다들 그것에 질리게 될 때 찾아오리란 전망이다. 하다못해 ‘구조조정’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한, 구조주의의 수명은 계속 연장될 것이다. 우리는 구조주의 패러다임 안에 있다는 뜻이니까. 이런 주장이 떠올려주는 것은 오래 전 방한했던 프랑수아 도스의 말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의 저자인 그는 구조주의 전성기 때 프랑스에선 축구팀 코치도 ‘구조조정’이란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기대와는 달리 전혀 우습지 않은 일화다. 그런 일화가 ‘역사’가 아니라 아직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관점이고 세계관이다. 세계에 대한 견해가 시점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자명한 ‘상식’을 일깨워준 것이 구조주의의 기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바르게 세상을 보고 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자각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가령 30여 년 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미국 사람이 보는 베트남 풍경과 베트남 사람이 보는 베트남 풍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한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조지 부시의 반(反)테러 전략에도 일리가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 시민의 ‘상식’이 되었다. 자신이 구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구조주의적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구조주의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세 사상가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다.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 마르크스라면, 프로이트는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덧붙여 고전문헌학자 니체는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단언했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기의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다. 자기의식이란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 이질적인 자리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다른 곳의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19세기 독일의 부르주아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들은 자기만의 가치판단을 인류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 현대인은 바보가 되었는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구조주의의 ‘땅고르기’를 했다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직접적인 연원이 됐다. 소쉬르는 어떤 것의 언어적 가치라는 것은 그것이 언어체계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것 자체에는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 확장해보자면, ‘나’라는 정체성 혹은 자아는 그 자체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소쉬르의 사상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 하에서 문화인류학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 기호론의 롤랑 바르트, 사회사의 미셸 푸코가 등장하게 된다.

입문서인 만큼 기존의 구조주의 해설서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없지 않지만, 몇몇 대목에선 저자의 안목이 도드라진다. ‘권력=지’가 되는 ‘표준화의 압력’에 대한 비판이 푸코의 핵심 사상이므로, 푸코의 저작이 전 세계 인문사회과학도에게 필독서가 돼 있는 현실은 분명 역설적이라는 지적이 그런 경우다. 또 바르트의 용어 ‘에크리튀르’를 설명하면서 ‘아저씨의 에크리튀르’, ‘교사의 에크리튀르’, ‘깡패의 에크리튀르’,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 등을 예로 든 것은 “에크리튀르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지닌 ‘자연’적 어법에 부여해야 하는 사회적 장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의 문장을 예전에 곱씹어 읽으면서도 내가 무얼 이해하지 못했던가를 일깨워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책은 내게 제값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10. 11. 12.  

 

P.S. 서두에서 적은 구조주의자 카툰은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의 표지에 들어있기도 하다. 우치다 하츠루의 책을 읽고 다시금 관심을 갖게 돼 나는 절반만 읽었던 이 책의 3-4권을 마저 구입했다. 2권짜리 영역본도 '백업용'으로 구입하고.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과 함께 오래 망설이던 시리즈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돼 감회가 없지 않다. 물론 독서시간도 손에 넣는 게 남은 과제이다.  

현대 지성사가인 프랑수아 도스의 책 얘기가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그의 평전<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도 이번에 구한 책이다(우리말 번역이 진행되고 있는 책이다). 덧붙여, <의미의 제국>도 자꾸 눈길이 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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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16: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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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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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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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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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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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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