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너머의 세계공동체

이번주 시사IN의 서평란 '7월의 책꽂이'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책꽂이'는 매달 첫 주에 나가는데, 내겐 격월로 차례가 오는 걸로 알지만 내부 사정으로 지난달에 연이어 '인문사회과학' 꼭지를 맡게 됐다. 몇 권의 후보작 가운데,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그린비, 2010)를 다루었는데, 같이 후보작에 들어 있던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 2010)도 조금 걸쳤다(물론 다 읽을 여유는 없었다). '주권 너머' 혹은 '트랜스내셔널'이란 주제에 관해서라면 최근에 나온 임지현 교수의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 2010)도 같이 참조할 수 있겠다. 아, 그렇게 되면 사카이 나오키도 있고, 니시카와 나가오도 있고...    

 

시사IN(10. 07. 03) 국가와 국민을 '해체'하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정부와 다른 의견서를 유엔에 제출하자 정운찬 총리가 내뱉은 말이다. 매섭기로는 매카시즘의 언어 못지않다. “어느 나라 정부냐?”란 물음을 되돌려주면서 동시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국가이고 무엇이 주권인가. <주권의 너머에서>의 저자 우카이 사토시가 던지는 질문이기도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소학교 4학년이었던 그는 일본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5학년이 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소국민’에 대해 거리감을 갖게 된다. 자신이 부르던 노래와 흔들던 깃발에 불쾌감을 느끼며 ‘국민으로의 길’에서 일탈하기 시작했다. 천황제와,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그리고 내외의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 거부 같은 일본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주권 너머’에 대한 이론적 모색과 성찰에 몰입하고 있는, 한 일본 지식인의 전력이다. 

세기 전환기의 대략 10년간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에서 우카이 사토시가 성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대테러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운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우경화, 노숙자와 외국인 문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카이 사토시는 이런 것은 문제의 표면이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주권의 문제라고 본다.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권론 서설’에서 이론적 시사점을 얻어오는데, 마침 발리바르의 글은 최근에 나온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에 ‘주권 개념에 대한 서론’으로 소개됐기에 참조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칼 슈미트의 주권론을 재검토하면서, 슈미트에게 주권은 항상 국경 위에서 설립되고 국경의 부과로 실행된다고 지적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주권이론과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란 그의 유명한 정의가 국경의 문제에서 조우한다고 말한다. “국경은 ‘정상적인’ 법질서에 대한 통제와 보증이 중지되는 대표적인 장소이자 ‘폭력의 합법적 독점’이 예방적인 대항 폭력의 형태를 띠는 장소다.”

과거 16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지역을 구획하거나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국경의 확정에서 유럽은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근대적 주권 국가는 그러한 영토화를 통해서 탄생했다. 문제는 “과거 수세기에 결쳐 형성되어 온 유럽의 정치문화와, 유럽연합의 구축이라는 현재의 과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근본적인 괴리이다.” 전쟁과 내란을 통해 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집단적 주체의 구축 과정, 곧 국민의 발명 과정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카이 사토시와 발리바르가 공통 화두로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 곧 주권에 대한 대안을 성찰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다.   

'주권의 너머'를 위해서는 '환대의 사유'가 필요하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다. 노숙자(노상생활자)와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유’와 ‘촉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대의 실천을 막는 ‘주권의 윤리’를 “실효성 있게 탈구축하는 과제”가 아직 저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물음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나눠가져야 할 몫이다. 

10. 06. 28. 

P.S. 마지막 문단의 '탈구축'은 데리다의 용어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의 일어 번역이다. 우리가 보통은 '해체'라고 옮기는 단어다. 우카이 사토시는 데리다의 제자라고 하며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 <맹인의 기억> 등을 일본어로 옮긴 바 있다. 그가 발리바르에게서 재인용하고 있는 건 칼 슈미트의 <대지의 노모스>에 나오는 내용인데, 국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칼 슈미트의 주저들이 조만간 다시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도 재출간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