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배송된 책과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가방 가득 채워넣고 귀가하면서 우편함에 들어 있는 잡지와 계간지까지 손에 들고 왔다. 계간지는 <문학동네>(가을호)인데,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이란 특집에 짧은 글을 보탠 바 있다. 여기에 옮겨놓는다.  

문학동네(09년 가을호)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모든 질문이 질문의 계기와 질문하는 자리를 갖듯이 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질문과 대답의 자리는 비대칭적이다. 나는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을 묻는 자리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자에게 질문하는 자는 마치 심문자처럼 언제나 대타자의 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대타자의 앎에 대한 두려움만이 나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밀알이다. 아니, 자신이 하나의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다.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사례가 된 이 환자는 의사들의 노력으로 겨우 치료가 됐다. 즉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 이제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문 밖에 닭 한 마리가 있는 걸 보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즉시 되돌아왔다. 닭이 자신을 먹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낱알이 아니라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잖은가?”라고 의사가 물었다. 환자의 대답은 이랬다. “네, 물론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  

물론 이 사례담은 우스개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처럼 기독교의 신에까지 사안을 고양시키게 되면 이건 ‘진지한 우스개’이자 ‘숭고한 우스개’이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아버지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할 때 신은 그 자신을 잠시 믿지 않는다. G. K. 체스터턴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신이 잠시 동안 무신론자로 보이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젝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야말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덜 무신론적’이라고 진단한다. 모두가 회의주의자의 포즈를 취하며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들을 착취하며 윤리적 제한들을 뛰어넘는다. 신의 무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에도 세 가지가 있는 듯싶다. 한편에는 여전히 문학에 대한 진지한 믿음, 철석같은 믿음을 견지한 문학의 사제와 신도들이 있다. 반면에 마치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문학은 죽었다’라고 공언하는 종말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제도적 관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문학의 생산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문학이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사르트르)이라는 정의 자체를 오늘날의 문학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 다만 문학의 변신을 새로운 가능성이란 이름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변절로 간주하여 내치느냐에 따라 의견은 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은 문학의 존재/부재를 ‘믿는다’. 결코 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여기서 문학에 대한 믿음의 과잉과 결핍은 ‘사변적 동일성’으로 묶인다.  

반면에 제3의 입장은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이란 형식을 취한다. 이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자신의 눈을 믿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으며 그래서 속는다. 문학에 속아 넘어간다. 즉, 문학의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어떤 것을 믿는다. 대타자를 믿는다. 이들은 ‘닭’의 존재를 믿는 ‘낱알’들이다. 지젝은 그 ‘낱알들’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기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안네 프랑크와 함께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신념을 끝까지 견지한 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든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은 다시 W. B. 예이츠의 시구에서도 식별해볼 수 있다.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제2의 강림 The Second Coming」 중에서


오늘날 ‘최선의 무리’들조차도 문학의 ‘상징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냉소적․회의적 포즈로 물러나 앉는다(대학의 문학 강의실이나 문학인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반면에 ‘최악의 무리’(군중)는 온갖 광신적 행동에 동참한다. 문학이라고 포장된 온갖 것들에 재미를 붙이고 의견을 보탠다. 남은 선택지는 ‘침몰해가는’ ‘순결한 의식’이다. 이 순결함의 사례로 지젝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뉴랜드의 아내를 든다. 그녀는 남편이 오렌스카 백작부인과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실을 품위 있게 무시하고 그의 충실함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답변인가? 그렇다. 해서 결국 나는 병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다. ‘한국문학의 과잉과 결핍’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건 말할 수 있다. 나도 이름을 보탠 한 선언이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6.9 작가선언'에서)

내가 보태지 못한 말은, 이 선언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가장 예민한 살갗일뿐더러 가장 질긴 살갗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가장 먼저 상처 입지만 가장 늦게까지 아물지 않는다는 것. 가장 빨리 아파하지만 동시에 가장 늦게까지 아파한다는 것. 이제 그런 문학이 ‘존재’하도록 모두가 애써 연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당신의 정절을 믿어요.”  

09. 08. 28.  

P.S. 서두에서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계기'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마감이 지나 이 원고를 써야 할 시점에서 또 다른 서평을 위해 읽어야 했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달리 대답거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지젝이 언급한 믿음의 문제를 한국문학에 적용해보았다. 인용한 예이츠의 시는 보통 <재림>이라고 옮겨지는데, <시차적 관점>에서 재인용하며 번역된 제목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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