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며칠 전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이번주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꼭지인데, 철학이 생활세계와의 '반성적 평형상태'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철학(서)의 번역과 사회적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로 분류해놓는다. 기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이란 구절은 하버마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필자가 하버마스 전공자인데다가 최근에 번역서도 출간했으니 이유가 없지는 않다. 하버마스의 신간인 <분열된 서구>(나남, 2009)는 작년인가 영역본을 구하려고 애썼던 책이기도 해서 반갑다...    

 

교수신문(09. 06. 08)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요즘 우리나라의 독서 시장에서는 대단한 고전이 아닌 철학 번역서의 경우 1천부 이상을 팔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인데, 언론에 매우 호의적인 서평이 실린 경우라도,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철학의 인기가 형편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상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학령인구 대비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 아닌가. 그 많은 대학생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의 가장 큰 몫은 다름 아닌 우리 철학자들이 져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지금, 학문 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반성적 평형’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철학은 그것이 우리 생활세계의 삶의 경험이나 문화적 인식의 합리적 재구성 같은 데서 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의 철학적 이론들을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경험과 문화적 인식의 올곧고 참된 합리적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은 단지 시대하고만 불화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지반이어야 할 삶 그 자체에 대해 겉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그저 동서양 외국들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수입했을 따름이다. 퇴계의 철학조차 우리에게는 예컨대 현재의 미국보다도 더 먼 외국이라고 보아야 할 옛 조선의 철학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의 철학 언어는 온통 번역어, 그것도 주로 제대로 통일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일본식 번역어다. 예컨대 ‘a priori’를 전혀 뜻이 다른 ‘선천적’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고는 사람들보고 이해하란다. ‘선험적’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지만, 이 말은 이미 다른 개념의 譯語로 굳어져 사용된다.
물론 이 말도 번역하고자 하는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의 뜻을 적절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변증술’이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의 철학적 언어들은 생활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멀리 휴가를 가 있는’ 언어들일 뿐이다. 그나마 마음 놓고 권할 수 있는 번역서조차 많지도 않다.

철학적 문제들도 대부분 우리의 문제들이 아니다. 윤리학은 도덕의 문제를 다루면서 ‘의무론’과 ‘결과론’을 들먹이는데, 도덕을 무슨 ‘삼강오륜’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문제 틀을 너무 낯설어 한다. ‘진리’의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 철학적 인식론을 소개하면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인식론이 다루는 진리는 학생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껏 철학에 대한 어떤 영웅주의적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의 철학 언어들은 우리의 생활세계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종의 ‘외계어’일 뿐이고,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딘가 번지를 잘못 찾은 문제들이다. 그래서 단순히 심심찮게 시도되곤 하는 ‘철학의 대중화’ 노력 같은 것으로 극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관건은 우리나라의 철학이 우리의 생활세계적 문화에 대해 연속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창조적 긴장의 관계, 말하자면 ‘참여적 비판’의 관계를 어떻게 하루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장은주 서평위원 영산대·철학)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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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6-12 11:24 
    ‘“반성적 평형’의 상태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철학, 어디로 휴가 갔나” — via 로쟈
 
 
- 2009-06-1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어떻게 보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니까 읽지 않는 것 아닐까요? 더불어 한국과 GDP가 비슷한 국가들에서 과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저자의 꽤나 중요한 저작'들이 얼마나 팔리는지도 궁금합니다.

제 생각엔 왜 이 대단한 책을 읽지 않을까이런 글들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앞선 기술이 시장에서 안 먹힐까, 왜 이 베토벤 7번 교향곡이 대중적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과 같은 게 아닐까요? 더 뛰어난 책으로 승부하면 될 일이라는 시각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또 저런 글을 쓰는 분 중에 정작 자신이 제대로 쓰거나 번역한 책이 있는 분도 흔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는 뭐하고 시간보내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많은 대학생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면 그 많은 교수들이 뭐 쓰는지도 그만큼 의문스러워야 될텐데.

로자님, 절대 offensive한 의도로 쓴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인문학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반성적 평형'에 힘을 보태지 못하는 글이나 쓰면서 시간 보낼 바엔 본인이 직접 뭔가 하고 나서 결과는 세상에 맡기는 게 지적인 자세가 아닌가 하는거죠.

로쟈 2009-06-17 08:20   좋아요 0 | URL
인문학계나 학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순 없겠죠. 한데, 이건 당분간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강단 인문학의 경우 대중과의 소통보다는 자리 보전이 더 시급한 형국이라서요(대중의 관심이 아니라 연구비 지원으로 먹고 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