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출간도서 가운데 흘려보냈던 책의 하나는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09)이다. 제목만 보고 진지하게 들여다 보지 않았는데, 나름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관련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기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도 언급되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 가장 주목할 영화 중의 하나이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이기도 하고).   

»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정점을 이룬 뒤 계속 하락을 거듭했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월트에게는 이 상황을 개탄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겨레21(09. 03. 13)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미국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르렁거릴 일만 남은 노인이다. 필요할 때만 전화 거는 자식들은 정이 뚝뚝 떨어지고, 거주하는 주택단지를 아시아인들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나눌 이웃도 사라져간다. 그런 그를 찾아오는 것은 ‘애송이 신부’뿐. 생전의 아내가 개종을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월트에게 남은 것은 포드 공장에 다닐 때의 상징인 자동차 ‘그랜 토리노’와 50년 동안 모은 공구들이다. 집 앞 베란다에 앉아서 한정 없이 맥주를 들이켜는 그의 표정에는 ‘개탄’이 가득하다.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외치던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마저 ‘이게 아니다’란 생각이 든 것일까. 그 좋던 시절은 다 가버린 것일까. 2000년 로버트 D.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펴냄·정승현 옮김)에서 증명하려 한 것이 바로 ‘공동체주의자’ 미국인들의 ‘내리막 내러티브’다.  

볼링 인구 10% 증가, 리그 볼링은 40% 감소

책은 1995년 퍼트넘의 같은 제목(‘Bowling Alone: America’s Declining Social Capital’) 논문에서 출발했다. 이 논문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제목은 ‘혼자 볼링하는 사람이 늘어났음’을 명제로 내세운다. 이 ‘단언’은 통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체육 활동의 경향이 전국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볼링 인구만은 늘어났다. 1996년 어느 날은 9100만 명이 볼링을 쳤는데, 이 수는 1998년 국회의원 선거 투표자보다 25% 많다고 한다. 그런데 1980~93년에 볼링 인구는 10% 성장했지만(인구 성장까지 감안하더라도 높은 수치) 서로 어울려 치는 리그 볼링은 40% 이상 줄어들었다.  

스포츠뿐일까. 미국의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절정을 이룬 뒤 끊임없는 하락세를 보였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네트워크’ ‘공동체’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가족과 친족을 합친 확대가족, 교회의 주일학교, 통근열차에서 포커를 치는 회원들, 시민단체, 인터넷 채팅 그룹, 직업 관련 인물들과의 네트워크 등을 모두 포괄한다. ‘공동체주의’는 19세기 초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감탄하며 제시한 ‘미국의 정신’이다. 토크빌은 미국인이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이웃을 배려하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시민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게 형성된 작은 사회로 물러나고 대규모 사회는 스스로 알아서 돌보도록 즐겁게 맡겨버린다.” 호혜정신으로 발동하는 ‘개인주의’가 사회와 조화롭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1960년대’라는 좋은 시절은 베트남 반전운동과 흑인·여성 인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저자는 투표율, 단체 백과사전, 자선사업 기부, 회의 참석자, 친구와 친척의 방문,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인구 수, 직장에서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자료 등을 동원해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세밀하게 증명한다. 통계 자료를 분석해 엄밀하게 결론을 끌어내는 ‘정론 직필’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터넷과 전자우편, 전화 등의 새로운 미디어도 사회적 자본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경우는 이렇다. 빌 게이츠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사회적 자본의 추락은 시작됐으며 이후 인터넷이 새로운 사회적 자본의 반등을 만들어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월터는 이웃에 사는 아시아 몽족에게서 미국에서 사라진 호혜와 배려의 정신을 발견한다.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아시아 인종도 구별 못하는 월터에게 이 몽족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가 된다. 그는 이 사회적 자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영웅적 행동을 한다.

경제사회적 분석은 가볍게 다뤄

<나 홀로 볼링>에서도 비슷한 예를 하나 든다. 64살의 전 병원 직원 존 램버트와 33살의 회계사 앤디 보쉬마는 볼링 리그를 통해서만 서로를 아는 사람이다. 램버트는 신장 이식수술 대기자 명단에 3년째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였는데 보쉬마는 이 딱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다. 두 사람은 직업과 나이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보쉬마는 백인, 램버트는 흑인이었다. 퍼트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작은 방식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미국인들은 서로서로 다시 연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간단명료한 주장이다.”

‘작은 방식’은 저자의 중요한 전략이지만, 옮긴이의 말에서 전하는 대로 <나 홀로 볼링>은 경제사회적인 분석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경제적 요인에 대해 “장기 불황 때 (사회적 자본이) 잠깐 감소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처리하고 만다.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본주의나 시장 이데올로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의 ‘실사구시’ 입장에서는 통계 자료가 마땅치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공동체 형성’이 정치사회와 맺는 관계가 그렇게 간단치 않음은 한국 사례로도 입증될 수 있겠다. 지난해 촛불집회와 인터넷·전화를 통한 조직화를 퍼트넘은 어떻게 해석할까.(구둘래 기자) 

09.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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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3-13 19:18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2. 대성의 생각
    from robmind's me2DAY 2009-03-21 03:09 
    [알라딘서재]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읽어보자
 
 
2009-03-13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3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3-14 09:00   좋아요 0 | URL
<그랜 토리노> 봐야될 영화군요.

로쟈 2009-03-14 23:36   좋아요 0 | URL
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