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와 제목만 보고 그저 그런 작품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리뷰를 읽고서 자세를 고쳐 잡은 작품이 있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의 데뷔 장편소설, 이자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작, 그리고 벌써부터 '2009년 최고작'이란 평까지 들려오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문학동네, 2009)이 그것이다. 이미 알라딘에는 주간 베스트셀러에도 올라와 있으므로 뒷북성 멘트가 되겠지만, 여하튼 '물건'을 못 알아보고 지나칠 뻔했다. 관련기사들을 챙겨놓는다. 그리고 드는 건, 역시 아직도 가능한 문학은 '제3세계'(내지는 '제3세계적 체험')에서 나오는구나란 생각. 요즘은 정치경제적으로 우리도 제3세계 뺨치는 만큼 혹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종언 이후의 물건'에 대한 기대는 아직 버리지 말고 모셔두어야겠다...   

경향신문(09. 01. 17) 운명의 저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의 이름이나 유래가 무엇이든, 유럽인이 이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를 포함하는 서인도제도의 두번째 큰 섬)에 도착하면서 푸쿠를 세상에 풀어놓았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모두 푸쿠의 자식이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41)의 첫번째 장편소설이자 2008년 미국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서 ‘푸쿠’는 중요한 모티브다. 삶과 운명에 스며든 저주쯤으로 옮겨지는 푸쿠는 유럽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시작됐고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통해 계승됐다. 푸쿠가 지배하는 삶은 개인사, 가족사를 한 국가의 정치 및 역사와 묶어놓는다.

자못 심각한 주제이지만 소설은 때로는 경쾌하고 발랄한 문체로, 때로는 가슴 찢어지는 감동과 애절함으로 미국에 이민 온 도미니카 가족 레온가의 삶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110㎏에 육박하는 거구에 못생기고 사교성도, 운동신경도 젬병인 검둥이 오스카 와오. SF와 판타지 소설에 열광하면서 ‘도미니카의 톨킨’을 꿈꾸는 그는 형편없는 외모와 오타쿠 기질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게 절대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무력감에 빠져있다. 반면 오스카의 누나 롤라는 긴 생머리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그러나 청소년 시절 갑자기 찾아온 ‘변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방황한다. 자신을 진정 변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그 실체는 쉽사리 잡히지 않고 상실감만 커진다.  


유럽의 식민지배와 독재정치 속에서 도미니카 주민들은 나쁜 운명인 ‘푸쿠’와의 싸움을 계속해 왔다. 사진은 도미니카의 주민들이 홍수로 물이 넘친 거리를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다. 

남매의 엄마인 벨리시아의 삶도 질곡을 헤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버지 아벨라르가 트루히요에게 찍혀 온 집안이 몰락한 순간 태어난 그녀는 열렬했던 사랑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여곡절끝에 미국에 건너오지만 고된 노동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마침내 유방암에 걸린다.

이 소설은 오스카와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 등 3대에 걸친 가족이야기를 롤라의 남자친구인 화자 유니오르의 시선에서 시·공간을 옮겨가며 펼쳐보인다. 소설 속의 남자들이 전형적인 남성성에 도전하는 것, 시대 배경과 화자가 계속 바뀌는 것, 소설에 주석이 달린 것은 작가의 포석이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는 건 독재자에 대한 반발이며 산산조각인 듯하면서도 기적적으로 붙어있는 건 카리브해 섬나라들의 이미지다. 주석은 여러가지 목소리를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오스카는 휴가를 보내러 산토도밍고로 떠나고 자기 인생의 단 하나뿐이라고 믿어지는 진정한 사랑, 이본을 만난다. 그러나 이본과의 사랑은 오스카의 목숨을 대가로 한 것이고 그는 기꺼이 평온한 표정으로 화염에 휩싸인다. 오스카 가족의 삶은 독재자 트루히요, 나아가 서인도제도를 지배한 유럽 식민자들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푸쿠가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는 건 아니다. 힘차게 사랑하고 살아낸 오스카의 가족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 푸쿠에 저항하면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역주문인 ‘사파’를 외쳤던 것이다. 나아가 작가 디아스가 도미니카인들의 삶을 미국 주류문단에 불러내는 것 역시 모종의 ‘사파’인 셈이다.(한윤정기자)   

 

씨네21(09. 01. 15) 어쩌면 2009년 최고의 독서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읽고 나니 불 켜진 극장 안에 혼자 남은 듯 머리가 얼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혀 같다. 이야기를 삼키고 역사를 삼키고 정치를 삼키고 그 땅에 사는 인간의 삶을 삼켜 토해내는 붉은 혀. 주노 디아즈의 첫 장편소설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탄생에 걸린 11년조차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저주와 마녀가 그 힘을 잃지 않은 땅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 시작된 오스카의 선조 데 레온 가족의 피와 체액이 흐르는 연대기가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오스카는 저자 주노 디아즈와 여러 면에서 겹치는 역사를 가진 젊은 도미니카계 미국인이다. J. R. R. 톨킨을 꿈꾸는 체중 140kg의 오스카는 도미니카계 남자라고 믿을 수 없게도, 동정이다. 동정없는 세상에서 홀로 동정인데다 코믹스와 판타지, SF소설에 빠져 살며 말은 <스타트렉>에 나오는 컴퓨터처럼 하다 보니 친구도 없다. 그와 대학 기숙사 방을 함께 쓰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에게 반한 유니오르인데, 그가 이 책을 끌어가는 화자다.

미국에서의 이들 삶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독재자 트루히요하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어머니, 할아버지의 삶으로 건너간다. 주노 디아즈는 어째서 인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정치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했던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로 들려준다. 정치와 멀리 있었음에도 정치 때문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긴 이들. 하지만 갈비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뭉개지는 순간에조차 비꼬고 풍자하는 화자의 혀는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가 독재자 치하의 사람들처럼 화자 1인의 의견만 접할 수 없다는 주노 디아즈의 신념은 도미니카의 역사와 트루히요에 대한 독재에 얽힌 작가 주석을 권말에 두툼하게 달아놓았다. 그마저도 재미있다. 거시사와 미시사,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맞물려 돌아가는 양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한 셈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두루.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퓰리처상을 비롯해 미국비평가협회상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지 않을 정도의 상을 수상했고 아마존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휩쓸었다. 닉 혼비는 “최근 책들 가운데 이 책과 견주어 나가떨어지지 않은 책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라고 이 책을 추워올렸다.(이다혜)  

09. 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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