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신병주의 <이지함 평전>(글항아리, 2008)을 다루었다. 곧 기축년 새해를 맞게 되기에('기축년'은 음력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을 찾은 것인데, 정작 <토정비결>은 토정의 직접적인 저작은 아니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인데 조선 중기 정치적 혼란기에 '비결'류의 책들이 여럿 나왔다고. <남사고비결>, <북창비결>이 <토정비결>과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유행한 '예언서'였다고 한다. 여하튼 나로선 토정비결을 보는 셈치고 읽은 책이다(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인터넷 토정비결을 봤는데, 두 곳의 운세가 서로 달랐다.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시사IN(09. 01. 03) <토정비결>은 토정이 쓰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새해를 맞는 만큼 어김없이 토정비결을 찾아보는 이들이 많을 듯싶다. 무슨 사자성어처럼 쓰이지만 ‘토정비결’은 ‘토정의 비결’이란 뜻이다. 흙으로 지은 정자를 가리키는 ‘토정(土亭)’은 알다시피 이지함(1517-1578)의 호이니 고유명사다. <토정비결>은 이지함판 <시크릿>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시크릿>이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려 한다면, <토정비결>은 자력구제가 가능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한 해의 운세를 일러준다. 흥미로운 건 이지함이 상식과는 다르게 <토정비결>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토정이란 이름을 빌려 썼을 거라는 얘기다. 그 이유로 저자는 이지함이 점술과 관상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친숙한 민중 지향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든다.   

사화(士禍)의 회오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 갔지만 이지함은 세상을 잊은 채 현실을 외면한 은둔거사가 아니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 ‘처사형 학자’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갖고서 민생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쓴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지함 또한 천거를 받고 1573년에 포천현감에, 1578년에는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이상을 펴보고자 했다. 

그의 핵심적인 사회 경제사상은 무엇이었나?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포천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그는 상․중․하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한다. 상책은 국왕이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고, 중책은 국왕을 보좌하는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청렴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하책은 땅과 바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농업이 본업이던 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은 덕이 본(本)이고 재물이 말(末)이지만 본말은 상호보완적이며,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리(利)’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앞선 그의 적극적인 국부 증대책과 해상 통상론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며, 이것은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지함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사직했다.  

<주역>에 따르면 변혁에는 시기와 지위와 능력이 필요하지만, 저자는 이지함의 경우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찾지 못했고 현감이라는 지위도 이상을 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민중을 위한 ‘토정의 비결’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08. 12. 29. 

 

P.S. 원고를 쓰다가 찾아보니 이문구 선생의 소설 <토정 이지함>(랜덤하우스코리아, 2004)이 눈에 띄었다. 테마로 글을 쓴다면 읽어보고 싶다. 소설 토정비결 류 외에 김서윤의 <토정 이지함, 민중의 낙원을 꿈꾸다>(포럼, 2008)도 소설로 <이지함 평전>과 비슷한 면모를 다루고 있을 듯싶다. 사실 <이지함 평전>은 서두를 읽으면서 가졌던 기대치는 총족시켜주지 못한는 책이었다. 가령 저자가 그리고자 하는 이지함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국부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는 신념과 유통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논리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지함을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나아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가이자 실천가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5쪽) 

이지함은 16세기의 개방적이고 다양한 학문 경향을 보여주는 핵심적 인물이며, 특히 적극적인 국부 증진책을 제시한 그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잘 알고 있으면서, 막상 우리 선조인 이지함이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러한 사상을 제시했던 사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론을 주장하고 실천한 학자 이지함,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지함은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15쪽)  

인용문만 놓고 보자면 이지함은 서양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 견줄 만한, 아니 그보다 앞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본론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입증'은 몇 가지 에피소드로 대체되고 있다. '북학 사상의 원조 이지함'에 대한 '본격 재조명'이라고 하기엔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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