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거푸 서평을 읽게 된 책은 지난 가을에 나온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이다. 사실은 이미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380365)에 꼽아놓고 "저자에 대해서 급 호감과 관심을 갖게 한다.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려다 말았던 책인데, 챙겨두어야겠다"고까지 적었더 책이다. 하지만 챙기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평들을 읽으니 다시금 관심이 되살아난다(서평을 보니 '인문학산책'보다는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소개기사와 함께 교수신문의 서평을 옮겨놓는다(다른 서평은 지면에서 읽은 거라 옮겨놓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이 책의 강점인 듯싶다. 책은 연말에 읽어볼 계획이다(지금은 연말이 아니란 말인가?)...

 

부산일보(08. 10. 04)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아야 민주사회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란다. 물론 그 자체로 사실이라기보다 그만큼 취약한 노동 환경을 빗댄 말이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것은 '인맹(人盲·110쪽)'일테다. 색을 구별 못하면 색맹이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니,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면 당연히 인맹이 된다.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있는 사회'(신성림 옮김/동녘)는 철학서다. 하지만 난해하고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읽는 도중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교양서다. 저자는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그 골격을 '사회적 품위'에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 철학교수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1995년. 벌써 13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국내에는 처음 번역됐다. 그럼에도 그의 주제어인 '품위'나 '모욕사회' 등의 개념은 일찍부터 국내 철학교수들의 논문과 저술 등을 통해 잘 알려졌다. 책보다 개념이 먼저 수입된 경우다. 다시 말해 진작 번역됐어야 하는 철학서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 책이 첫 출간된 1995년보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사회에 더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절차) 민주주의가 달성된 지 10여 년. 하지만 사회, 문화, 경제 전반의 일상 민주주의는 오히려 양극화라는 암초에 걸려 교착상태가 됐다.

그런 가운데 사람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딱히 노동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을 기계나 동물로 취급하는 경우를 자주 마주친다. 사생활이 위협받는 감청이나 검열 문화, 장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도 그런 사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욕의 주체다. 모욕은 지극히 사적인 용어이지만, 그럼에도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속성을 지녔다. 아니 사적인 모욕은 스스로 예방해 피할 수 있지만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모욕은 그럴 수조차 없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어떤 사회는 장애인용 설비를 마련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장애인들의 독립성을 확보한다. 반면에 또 다른 사회는 다른 사람의 '선의'에 주로 의존한다. 후자는 당연히 모욕 사회다. 특히 그럴 만한 여유를 가진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200쪽)" 그런데 그 사회적 모욕은 대부분 제도의 결핍에서 생성된다. 결국 제도를 바꿔야 모욕사회에서 품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 테다.

책은 4부 16개 주제 글로 구성됐다. 주제 글은 모욕, 권리, 거부, 시민권, 속물 등 서로 다른 낱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중요하게 연결돼 있다. 그 낱말을 하나씩 이어가다 보면 시나브로 '품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된다.(백현충 기자)

교수신문(08. 12. 15) 인간의 존엄성은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1996)는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이나 A. 매킨타이어의『덕의 상실』(1981)이후 철학계에서 제시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상사회론 중 하나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이다. 저자에 따르면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

저자에 의하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시킬 합리적인 절차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분배의 인간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분배의 인간적 방식이 고려되지 않는 한, 세제나 복지제도를 통해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더라도 인격적 모욕이 사회제도적으로 자행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저자가 구상한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이로써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인격적 존엄성을 훼손키지 않도록 한다. 또한 저자는 인격적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는 것보다중요한 일이며,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격적 존엄성은 지켜질 수가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존 롤스가 말한 사회 경제적 차원의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했다. 이런 소극적 규정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저자는 ‘모욕감’이나 ‘긍지’, ‘자존감’, ‘자부심’, ‘친밀함’, ‘동정’ 등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가 평소 간과했거나 뭉뚱그려 보았던 마음의 다양한 결들을 상세히 기술하며, 얼핏 주관적 차원에만 머무를 것 같은 이런 심리들이 ‘품위 있는 사회’와 관련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혀준다. 이때 저자는 분석철학적 치밀함과 밀도를 일단 접고 ‘품위’나 ‘모욕’에 얽힌 풍속사적 뒷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근대의 ‘속물적 예법’이 ‘사생활’이라는 개념을 낳고, 그것이 다시 ‘개인’에 대한 자각을 형성하며, 이것이 토대가 돼 ‘존엄성’과 ‘모욕’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완성됐다는 주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분석이나 이야기만으로는 ‘품위 있는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적 원리가 무엇인지 적극적이고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저자는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과 『1984』에서 음영법으로 묘사한 형제적 사회주의가 자신이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사회상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저자를 이끄는 근본이념은 체제지향적인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일 것이다.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에 입각해서 저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신분이나 소속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자로 규정하고 업신여기는 사회는 결코 품위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설령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거나 특정 집단 내에서 인격적 평등이 보장되더라도 그런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盲’이 지배하는 저급한 사회일 뿐이다. 아리안 민족들만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장애인이나 유태인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고 학살한 나치정권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저급한 사회를 건설했었다. 오늘날에도 인간-맹들이 지배하는 ‘속물사회’는 인간을 민족이나 국적에 따라 분류한 후, 외국인 근로자들 차별하고 멸시한다.

속물사회는 같은 국민들 내에서도 비중 있는 사회에 타자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교한 장치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도 한다.그런데 평자가 ‘사해동포주의’라고 표현한 말은 조지 오웰이나 저자의 표현법에 따르자면  인간들 사이의 형제적 평등 관계를 의미할 것이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인종이나 직업,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에서 동등한 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모든 인간이 人格的으로 평등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이 그 누구도 타인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격적 평등이 모욕과 차별을 금지하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인격이 존엄하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저자는 인간 존엄성 정당화 이론들을 분석한다.

저자는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 유형을 비교한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적극적 정당화이다. 칸트가 인간의 존엄성을 정당화할 때 근거로 삼기도 한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적인 특성들이 인간을 존중해야할 근거가 된다. 반면 회의적 정당화는 인간에게 그런 선천적 특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이 두 번째 입장은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인간존중의 원천으로 여긴다.

인간 존중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세 번째 길은 소극적 정당화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해야할 적극적이거나 회의적인 근거는 없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은 피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있다고 소극적 정당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저자는 이 소극적 정당화론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면서 칸트의 적극적 정당화론이 지닌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목적결정능력’, ‘자기입법화능력’, ‘도덕적 주체능력’, ‘합리성’ 등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은 능력의 정도에 따라 서열을 나눌 수 있는 것이어서 평등한 존중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 칸트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소유하고도 사람은 비도덕적일 수 있는데, 칸트는 단지 그런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마저 존중해야한다고 불합리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칸트는 인간적인 특징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중받을 권리를 지녔다거나, 현재 그런 특징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중받을 권리가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해 칸트는 가령 『판단력비판』에서 태아나 갓난아이의 예를 들면서 인간들의 인격성의 차이를 깊이 있게 논했다. 그런데 저자가 칸트를 단순화시켜 비판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지는 이런 비판은 대개 선각자들이 전개한 사상의 전모를 균형있게 다루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 축소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영향사적으로 저자가 ‘인격적 평등’과 ‘인간존엄성’ 이념을 칸트에게서 전승받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품위 있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념은 ‘인격적 평등개념’과 ‘인간존엄성’사상이다. 그런데  회의적 정당화는 사실상 인격적 평등개념을 주관성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다른 한편 ‘인간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정당화의 근거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저자는 “모욕을 포함해서 모든 학대를 근절하라는 요구 자체는 어떤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도덕적 행동의 전형이 학대를 막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정당화가 끝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관적 도덕감에 의존하는 저자의 이런 생각과 달리 현실적으로 이런 소극적 정당화도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전제하지 않는 한, 결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비록 모든 경우에 대해 완벽하게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선험적 존엄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형태의 정당화도 성립될 수 없다. 

저자는 주요개념을 제시하고 난 후에는 그것에 딸린 하위개념들을 다루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 가족개념들의 타당성 근거를 확정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저자는 유기적 연관성을 쉽게 파악하기 힘든 주제어들을 산발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서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내용을 쫓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저자는 제 2부 제 1장에서 ‘존중의 정당화’라는 대주제를 제시하고 나서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들’, ‘내재적 가치의 제한조건’, ‘근원적 자유’와 같은 소주제들을 다룬다. 이런 제목만 보아서는 대주제와 소주제, 하나의 소주제와 다른 소주제 사이의 개념적 연결 관계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그런데 내용을  읽다보면 실제로는 각각의 주제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개념의 근원에 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처음부터 친절하게 이들 주제나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주지 않은 것일까. 독자에 대한 친절이 아쉬웠다. ‘품위’라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과연 사회이념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 책이 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이런 문제점을 독창적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그 성공여부와는 별개로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이진오 서울대 강사·철학)

08. 12. 16.

▲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가? 2008년 12월 8일 비정규교수 농성장은 경찰에 의해 박살이 났다.

P.S. 한국사회가 속물사회이자 모욕사회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는 비일비재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강사의 처우문제이다. 얼마전에는 500일 가까이 계속된 비정규직교수 농성장의 천막이 경찰에 의해 순식간에 박살나는 '사건'도 벌어졌다(현 정부 들어서 하도 극악한 사태들이 많이 벌어지는지라 뉴스 거리로도 취급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이란 프레시안의 기획연재(http://www.pressian.com/article/serial_article_list.asp?series_idx=313)가 총체적인 문제제기를 담아가고 있다. 한번 둘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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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품위 없는 사회, 품격 없는 국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12 22:47 
    내일자 '책읽는 경향'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이름은 이 책을 여러 번 언급한 지금도 입에 익지 않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요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정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필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로 돼 있다. 그러고 보니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노보 찬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듯싶다(<보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