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교수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3'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정현백 교수의 칼럼이다. '경방고수'들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끌었는데, 짐작엔 두 주 전 한겨레21 표지기사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3895.html). 그래서 일부를 같이 옮겨놓는다. 대학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칼럼과 함께 일독해볼 만하다. 더불어, 돌이켜보면 '자료'가 될 날도 오겠지...

교수신문(08. 12. 15)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이 사라진 시대, 당신들은 왜 침묵하는가

한국 지성을 논할 때에, 이를 대학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신문>이라는 지면의 특성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논의를 대학과 대학인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정보통신의 발달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한국 사회 곳곳이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은 가장 큰 변화를 강요당한 곳의 하나일 것이다. 치열한 대학 간의 경쟁, 위로부터의 개혁 압박, 대학의 양극화, 교수평가, 대학 및 학술행정의 전산화, 국제화의 압박 등이 그것이다. 대학은 이제 분주함이 그 일상이 됐고, 교수들은 게으를 권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런 대학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대학이 ‘지적 자유’라는 명분아래 안일함을 추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학에서 학문연구의 열기가 넘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계획에 근거한 대학개혁 몰아붙이기, 연구업적이나 평가의 계량화 등은 학문의 생산성은 높이되 ‘지성의 천박화’도 증가시키는 기이한 양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60년을 돌아보자면, 한국의 지성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중기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치열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화 따라잡기’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유학을 통해 서구의 지적 수준을 따라잡고자 했고,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부르짖으며 비판적 학술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과정에서 이런 지성계의 활동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현실화하면서, 한국 사회에 지적 역동성을 부여했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자기희생은 한국에 관심을 가진 국제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은 한국의 지성이 그 지적 긴장감과 역동성을 잃어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 비약해야 할 시점에서 한국의 지성은 주저앉아 버린 것이 아닐까. 대학평가, 학술지 평가, 연구논문에 대한 엄격한 심사시스템 등을 통해서 과거처럼 치밀한 연구 없이 그저 글을 써대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연구윤리도 강화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연구도 정밀해졌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지적 연구물들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중심부 학계의 모드에 끌려 다니고 있다. ‘왜 이 땅에서 이런 연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다.

출판 분야에서도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옥석을 가릴 수 없는 춘추전국의 시대,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업주의와 선정성이 판을 치고, 국내 학계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명한 외국서적의 번역서가 여전히 날개 돌린 듯 팔리고 있다. 나 스스로도 독서대중에게,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서적을 권장해야 할지가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거기에다가 서적들은 내용보다는 디자인과 크기로 한 몫을 보니, 저렴한 작은 문고판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쉬엄쉬엄 읽은 것도 목가적인 시대의 이야기가 돼 버렸다. 

바로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지성계는 피로감에 젖어 있다. 양적 연구업적을 강요하는 대학의 현실에 쫓길 뿐 아니라 몰아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급류 속에서, 지고의 도덕성을 부르짖으며 함께 해온 동료들이나 나 자신이 어느덧 ‘욕망의 주체’로 변신해버린 것을 발견하며 선뜻 놀라는 모습이 오늘 날의 한국 지성인일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에 뒤이은 자기성찰의 과정은 거의 부재하다. 소비자본주의의 끝없는 추구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대해 회의하는 의식혁명이나 문화혁명은 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는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글은 곳곳에서 출판되고 인구에 회자되지만, 왜 폭력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변화는 시도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성장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한국 지성의 인습성은 매일매일 대중매체를 메우는 진보-보수논쟁에서도 확인된다. 여전히  정치적, 문화적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핵심은 교과서 필자의 저작권, 공권력이 교과서 내용에 개입하는 절차민주주의의 문제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문제의 본질을 다시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호도한다. 올해 들어와 급격히 후진하는 민주주의 문제에 지식인들은 침묵한다. 거기에다가 보수/진보논쟁을 채우는 논리는 얼마나 천박한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닌 합리성과 체통을 우리 지성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보수논객들의 주장은 2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녹음테이프 돌리기’이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변화된 사회, 변화된 대중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촛불시위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요구와 욕구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방식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는 한국 지성의 성찰성 결여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서 한 단계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할 8,90년대에 이르러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모든 부담은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주어지고, 이들은 좌익세력으로 폄하된 채 고립돼 있다. 이쯤 되면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즈음, 구조적 한계를 넘어 분배정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크게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한국의 지성계는 침묵하고 있다. 그 대신에 언론을 메우는 것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계산하는 정치세력에 의한 보수-진보 편 가르기의 천박한 논리들이다.

나는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미네르바와 관련한 경제논객들의 이야기를 읽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인터넷의 경제토론방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경(제토론)방고수들은 50~60명 정도라고 한다. 모두가 계급장을 뗀 인터넷에서 하루 10~30만 명이 들어와 읽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각고의 글쓰기 노력과 경제지식을 요한다. 이들은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정체를 밝힌 한 보험회사 직원은 자신의 일과를 밝혔다. 아침 6시 30분에서 출근 두 시간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직장생활, 그리고 다시 밤 10~12시에서 그는 인터넷을 찾거나 글을 쓴다.



그들은 왜 이런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한 경방고수는 1997년 경제위기 때 줄 서서 아들이 돌잔치에 받은 금붙이까지 바친 이후 겪은 씁쓸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경제지식을 챙기고 또 가능하다면 無知로 피해를 보는 서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것이다. 이들 경방고수들이 염려하는 것은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민의 관점에 설 것을 선언한다. 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은 사라졌는가. 전문성과 대학의 경쟁력 제고를 표방하며, 지식인은 침묵해야 하는가.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저항하고 있는 역사교사들의 안간힘을 지켜보면서 당신들은 침묵해도 좋은가. 경제위기 속에서 존재를 위협당하는 작은 자들의 잔혹한 현실에 당신들은 침묵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에 전임교수들이 계속 침묵해도 좋은가. 이제 이 위기의 시대는 다시 한국 지성인의 건강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정현백 성균관대·사학)

한겨레21(08. 12. 05)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 경방고수 가운데 정부 발표를 쉽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상승미소’. 본명이 이명로인 그가 11월24일 다니는 회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0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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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6 13:56   좋아요 0 | URL
인터넷 공간이니 자유롭게 하는 거죠.제도권 학자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로쟈 2008-12-16 15:29   좋아요 0 | URL
제도권 학자들이 자기 몫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지식인의 죽음'이란 말도 나오는 거겠죠. 아마도 이젠 기대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