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학술적인 성격의 교양서로 가장 눈길을 끄는 책 두 권은 각각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를 다루고 있다(그래서 같이 모아놓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권은 지난 여름 유럽중심주의 역사학 비판서 <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 2008)로 처음 소개된 제임스 블라우트(제임스 블로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 2008)이고(http://blog.aladin.co.kr/mramor/2270833 참조. 저자명이 다르게 표기되는 바람에 알라딘에는 '제임스 블로트'와 '제임스 블라우트'가 서로 다른 인명으로 설정돼 있다), 다른 한권은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이다(로버트 영의 책으론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둘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1. 01) 왜곡된 유럽중심 이데올로기 해부

국가와 도시, 조직화된 종교, 봉건제, 노동분업, 민주제, 관료제, 근대국가, 자본주의….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이 처음 만들었거나 완성시켰다고 배워온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다. 유럽 어딘가에서 시작한 화살표가 동쪽(아시아)으로, 남쪽(아프리카)으로, 혹은 서쪽(아메리카)으로 퍼져 나가는 지도들까지 곁들여지면 이런 주장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저자는 이런 주장에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깔려 있다면서 하나씩 기각해 나간다. 세계사에서 항상 주변으로 간주돼 온 지역들을 복권시켜 유럽 단일 중심이 아닌 여러 개의 중심을 갖는, 혹은 아무런 중심을 갖지 않는 탈근대적 세계사를 서술하기 위한 노력이다.

기존 유럽중심주의의 기본 명제는 “유럽은 스스로 진보하고 근대화한다”는 것이다. “비유럽은 정체되고, 불변하고, 전통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유럽 역시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했으며 나름의 기술을 발전시켜 오지 않았는가. 유럽중심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유럽이 이식시켰거나 비유럽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확산론’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가 이룩한 상당한 기술적 진보들(예를 들어 제지술과 화약의 발명 등)은? 유럽중심주의자는 태연하게 답한다. “중세 중국과 인도에서 어떤 기술적 진보가 발생했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멈춰버렸다는 것”이라고. 이런 논리는 비유럽이 이룩한 진보를 뭉개버리는 도식으로 자리잡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492년은 비유럽 지역에 대한 대규모 식민지 시대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저자는 1492년 이전, 즉 중세 유럽은 비유럽에 우월하다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상당부분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돼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유럽 사람들은 유럽인과 달리 태생적으로 미개한 종자들이고, 비유럽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없다고 치부함으로써 노예제와 토지침탈의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속속 드러남에도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념체계가 강력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식민주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3년 발간된 이 책의 울림이 상당한 것을 보면 식민주의자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퇴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아류들이 판치고 있지는 않은지.(김재중기자)  

한겨레(08. 11. 01) 마르크스주의도 유럽 중심주의 갇혀 있다

로버트 영(뉴욕대 영문학·비교문화학 교수·사진)은 ‘트리콘티넨털(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을 제창한 이론가다. 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이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서발턴(하위계급·기층민중)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그 이론들의 진보적 유산을 3대륙 현실에 맞게 번역해 소화하려는 이론이다. <백색신화>는 영의 이론활동에서 전환점이 된 책이다.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몰두했던 영은 이 책 집필을 계기로 하여 탈식민주의로 이동했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지은이 자신의 이론적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넘어 탈식민주의 이론의 출현을 알린 저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미 바바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탈식민주의 사유의 역사적 계보학을 수립하는 데 의미심장한 기여”를 한 저작이다.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장이 막 형성되고 있던 때 그 장의 형성을 역사적 차원에서 보여준 것이 이 저작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탈식민주의 이론의 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서구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계승인 사르트르를 비판하고 알튀세르·푸코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기여와 한계를 동시에 검토하는 것이다. 이어 이들의 사유를 극복하려 한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의 이론을 탐색한다. 이런 검토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이 ‘유럽중심주의’와 ‘탈식민주의’이다. 유럽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중심주의에 갇혀 있었다면, 사이드 이후 탈식민주의는 이 유럽중심주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이론적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책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1990년 초판이 출간된 뒤 2004년에 재판이 나왔다. 2004년 판에서 지은이는 ‘다시 읽는 <백색신화>’라는 제목으로 긴 서문을 썼다. 한국어판은 이 재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의 토대가 된 것은 사이드의 기념비적 저작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그 어떤 지식도 오리엔탈리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는데, 영은 한발 더 나아가 서양의 가장 진보적인 이론들조차 유럽중심주의적 백색신화에 갇혀 있음을 입증한다. 이때 영이 맨 먼저 공략 대상으로 삼는 것이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를 흡수함으로써 주체를 더 큰 주체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주체-타자 대립을 해소한다. 지은이는 헤겔의 변증법이 19세기 제국주의 기획을 철학적으로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의 주권을 박탈해 주체에 통합시키는 변증법의 지식 구성 방식이 서구가 비서구를 지리적·경제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흉내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었을 뿐 유럽중심주의와 공모하는 개념체계의 작동양식을 뒤집지는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중심주의의 연장이었다. 지은이는 유럽의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인간 현상들을 경제결정론으로 환원시켰으며, 인간의 역사적 과제를 근대성 달성에 귀속시킴으로써 유럽 역사를 모범으로 제시했고, 혁명주체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수렴시켰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 담론은 “여성, 인종, 다른 소수집단들, 나아가 식민화되거나 식민화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을 겪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기능”을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한 것은 미래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기 때문에 결국 최선이었다고 한 마르크스의 진단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유럽중심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지은이는 사르트르가 식민지 해방 투쟁에 동참했지만, 결국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중심주의 한계를 반복했다고 비판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당시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제3세계에 대한 ‘생색내는 온정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제3세계 민중을 대신해 발언하면서 그들을 종국엔 지워버리는 유럽 마르크스주의를 지은이는 이렇게 비판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한계는 알튀세르·푸코·데리다·들뢰즈를 포함한 광의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됐다. 그리고 그런 이론적 바탕 위에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현했다. 그러나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 시스템을 폭로하기는 했지만, 그 시스템을 획일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비서구 내부의 모순·갈등을 보지 못했다. 이런 한계는 다시 바바와 스피박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사유의 새 지평이 열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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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스트식민주의와 문화번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9 21:00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국내에는 소개된 로버트 영 교수가 학술대회 참석차 방했던 모양이다.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그의 책으론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 두 권이 번역돼 있다. 간략한입문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책도 소개됨직하다. 교수신문(11. 06. 17)번역불가능한 것은 새로운 실천을 낳는 '씨앗' 제공" 로버트
 
 
노이에자이트 2008-11-01 18:27   좋아요 0 | URL
근대화는 서구화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간단하지 않을까요.예를 들어 유럽이 예전엔 이슬람을 통해 문물을 수입하던 때도 근대화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그렇게 되면 근대화가 몇 번 씩 있게 되지요.탈근대 논의에 이런 주장은 없나요?

로쟈 2008-11-01 19:27   좋아요 0 | URL
근대화의 모델을 만들어놓은 것이고 또 그게 가장 '성공적'이었기 때문이겠죠. 월러스틴이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른 '보편주의'를 세계화하고. 월러스틴은 근대 대학제도 역시 '유럽적 보편주의'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탈근대화, 탈서구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대학제도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요...